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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는 성경이다

그리고 Context는 성경이외의 모든 지식이나 정보등을 말한다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 이외의 다른 지식이나 정보들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것들을 충분히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성경의 제국들 즉 앗수르 페르샤 메데 바벨론 로마등의 역사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이스라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역사를 뒤져야한다


그리고 성경해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context의 예도 있다

헤겔의 변증법이다

<정>만을 고집하던 성경해석의 독재에서 <반>이 도전을 했고

결국 <정>과 <반>이 <합>을 만들어내는 획기적인 해석의 자유가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합>은 또다른 <정>이 되고 이것에 맞서는 <반> 등장하며

새로운 <합>이 또 도출되는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성경해석에 일방적 강요를 당하던 신자들에게 변증법이라는 context가

text 인 성경을 더 잘 이해하게 만든 예이다


이와같이 context는 text를 이해하는데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이 context는 어디까지나 context역활에 만족해야 한다

context가 text 자체를 변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건 매우 중요한 말이다

왜냐하면 text를 해석하는데에 있어서 context가 주인 노릇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로마서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한다고 가정해보자

(....당시에는 예수를 구세주와 주(Lord) 즉 왕으로 입을 열어 말하고 다니는 것은

로마 식민지로 살았던 시절에는 죽음을 담보한 위험한 일이었다

따라서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를 향한 절대적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입으로 시인한다는 말은 이와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1세기 당시의 상황이라는 context가 성경이라는 text에 영향을 미친 경우이다

사람에게(어느시대의 사람이든) 구원에 이르게 하는 프로세싱으로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다

이건 21세기에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다

즉 죽음의 위협을 당하지 않는 사람들 역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해석은 당시의 상황이라는 context에 부합한 text로 하향 조정하였다

text가 가진 권위가 상당 부분 부서진 것이다


참고로 성경은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를 따른다고 해도 그것이 믿음이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참조:마태7장)



또 다른 예를 보자


마태복음 19장에 나온 예수와 바리새인간의 이혼논쟁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약에 이 이혼논쟁에서 이혼불가의 예수의 발언을

이혼 후의 여성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이혼불가라고 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당시의 상황이라는 context가 text가 되어버린 형국이 된다 

물론 1세기에 중근동에서의 여성의 인권은 그야말로 바닥이었다

유대문화에서도 인구조사를 할 때 여자는 계산에 넣지도 않았으니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인습이 아직도 중근동에는 남아 있어 사우디 아라비아에서는 성인 여성이라고 할지라도 

남자라는 보호자 없이 혼자서 길을 걷는 것이 불법이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보면 그와같은 해석이 그럴듯 해보이지만 

이건 이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이 1세기에 국한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참고) 

마태19장은 이혼을 통한 합법적 간음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이다 

그래서 이혼불가를 선언하신 것이다 

[마태19: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라


마태복음19장과 동일한 내용의 말씀을 하는 마가복음 10장에서는 보다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마가10:11-12]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라


간음에 대해서 예수님이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하셨는지는 다음 말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마태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들은 합법적 이혼을 통한 간음을 저지를 것이므로 이미 간음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씀이시다



이혼불가라는 text는 어떤 context이든지 이혼불가라는 하나님 말씀을 변색시킬 수 없다

여성의 인권이 바닥이어서 이혼불가를 예수가 외친 것이라면

여성의 인권이 높아진 21세기에 이혼은 성경 안에서 가능한 도덕이 된다


이와같이 context는 단지 context여야만 한다

마태복음19장을 이해하는데에 있어서 context는 

당시의 유대인들의 문화가 남자에게 합법적인 간음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 정도로 한정되어야 한다

그래야 text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text를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text와 context의 잘못된 관계에서 비롯된 마태복음19장의 잘못된 해석에서 발견되듯이

context가(1세기의 유대인의 문화) 잘못된 결과물로서의 context를(21세기 이혼가능의 도덕) 

만들어 내기도 한다  


현대기독교가 무수히 생산해내고 있는 context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자기계발의 원리들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말씀이 이용되는 것이 그 예이다

자기계발이라는 context가 이제 text의 자리에 있고

text인 성경말씀은 자기계발이라는 context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이건 모두 context의 잘못된 위치선정이 그 원인이다 

context가 text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있는 형국이라는 말이다

이런 주객전도는 비일비재하다

아래의 예들은 얼핏 떠오르는 것들이다 

수의 부흥                                     하늘의 부흥

표적의 의미 혹은 메세지                 표적자체 (금이빨 기적, 병고침, 감정몰입에 의한 뒤집어짐 등)

예수와의 죽음의 연합                     종교적 카르텔

세상에 대하여 죽음                        세상에서의 성공

성도의 예배 (=제사)                      스타 강사의 공연

잃은 양 한마리                              공리를 원리로 적용한 교회

용서                                            불의와의 결탁

다하여 섬김                                  적당히 섬김


이밖에도 수도 없이 많다


모두 context와 text의 관계를 정확히 알지 못해서 벌어진 일들이다




성경은 시대와 상황을 초월한다

그게 성경의 권위이다

모든 context들 위에 군림하며 훼손당할 수 없는 가치이다

다윗과 요나단의 스토리를 통해 만약에 <관포지교>의 우정을 말하거나

아브라함의 비전을 통해 <꿈은 이루어진다> 따위를 말하는 것은

text인 성경을 훼손하는 일이다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모든 context는 text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 레몬빛 2012.07.22 04:24

    황순기 목사님,

    늘 관심있게 목사님 글과 설교를 듣는 이영훈입니다.


    그 동안 목사님과 context에 관한 이해점이 달랐는데,

    목사님의 글을 계기로 제 견해를 함께 나눠 봅니다.


    시간을 내어 목사님과 함께 토론함이 즐겁습니다만

    새벽에 시간을 좀 내야하는 제 스케쥴 상 글로 인사를 드립니다.


    혹 게시판 성격에 맞지 않다면 언제든 삭제하셔도 됩니다.

    미천한 글이나마 진리를 구함에 함께 한걸음 가까워졌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

    오직 Text만? Context 관한 오해

     

    일단 정의부터 무리가 있다. Text 성경, context 외의 모든 것이라는 목사의 정의는 이분법적이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정황에 관한 정보가 Context 해당되는 것은 옳은 지적이다. 하지만 Text 자체에도 context 숨어 있다. 전자는 상황’이나 정황’이라 부를 있고, 후자는 맥락’이라 일컫는다.  성서이든, 성서를 둘러싼 배경이든, 모두가 Context에서 벗어날 없다.


    일단 Text에도 Context 있다는 맥락의 문제부터 시작하자. 성서학에 들어가게 되면 일단 장(chapter) 절(verse) 개념부터 버리고 시작한다. ‘장과 절’ 중세수도사들이 성서를 남기고 연구하기 위해 편의상 도입한 개념이다. 그런데 수도사들이 부여한 장’ 개념이 오묘한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무의식적으로 독자는 장이 바뀌면 성서 사건이나 시간도 바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장과 절을 버리는 목적은 그것이다. 바로 맥락’에서 예수의 말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다시 언급하건대, 성서 맥락을 파악하는 것도 context 확인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context 매달리는 것이 과연 text 보편성을 상실하게고 의미를 퇴색하게 만들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일례로 이사야 34:16에서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의 짝’ 흔히들 성서 속의 다른 구절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되어 왔다. 즉, 성서의 구절은 성서 다른 구절과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 지지해 주고 보충해 준다는 그럴 듯한 해석이 된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이사야서 34장은 하나님이 원수를 벌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 하나님이 벌하신 땅을 짐승들에게 준다는 내용이 11절부터 소개된다. 마침내 16절에 이르러서는 하나님께서 짐승’ 가운데 빠진 것이 없으며 짝없는 짐승도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 나오고, 17절에서 하나님께서 차라리 여러 짐승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실 것이라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해답은 얻어졌다. 여기서의 짝은 성서 다른 구절의 짝이 아니라 짐승의 짝이다. 성서의 맥락을 무시하게 되면 이렇듯 하나님의 경고를 듣는 가운데 뜬금없이 신구약의 통일성’이라는 은혜(?)로운 해석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맥락을 무시한 가운데 하나를 이번에는 신약에서 찾아보자. 마태복음 18:20에서 사람이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는 구절이다.  구절은 주님이 임재하시는 교회,’ 혹은 교회모임의 당위성’ 등으로 곧잘 해석되곤 한다. 하지만 맥락을 살펴보면 그런 해석은 금세 설득력을 잃는다. 사실 같은 장 15절부터 이미 죄를 지은 사람의 치리문제를 다루는 와중에 구절이 속해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있어 잘못을 지적하였는데도 말을 듣지 않는다면 다시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며, 최후에는 교회에 말하라는 내용이다. 만약 그럼에도 그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되, 그렇게 세상에서 묶은 것은 하늘에서도, 것은 하늘에서도 것이니, 따라서 두세 사람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가운데 있다’ 말씀은 교회의 징계권과 관련된 모임으로 이해해야 함을 있다.


    이렇게 맥락에서 성서를 읽는 것은 context가 text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례이지만, 황목사의 주장대로 ‘context가 text 자체를 변하게 하는’ 우려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오히려, context 제대로 짚어 냄으로 text 의미를 더욱 본뜻에 맞게 살려내고 있으며, context 도움으로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은context 자신이 아니라 바로 text다.


    이번에는 황목사의 예를 살펴 보자. 로마서 10:10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구절은 비단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1세기의 context에만 머무르는 구절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황목사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결론을 추출해 오는 과정에 있어서는 견해가 다르다. 목사처럼 보편적인 신앙고백을 주장함이 아니라 해당context 타당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우선 순교를 각오한 신앙고백’이라는 적용에 한계가 있다.  당시 1세기가 그리스도인의 박해가 심한 무렵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당시의 모든 기독교문헌들을 순교의 맥락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로마서에도 점은 마찬가지여서, 로마서에서 바울의 관심은 끊임없이 율법과 죄, 이스라엘의 문제 등의 본질적인 개념이지 결코 핍박상황에서의 담대함이나 위로를 전하는 것이 아니었다. 로마서의 context 순교를 각오한 신앙고백을 주문한 것과는 분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10장은 바울의 동족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신의 의에 집중했다는 과오를 지적하며, 율법으로 얻게 되는 의와 믿음으로 얻게 되는 의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이어서 나오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문제를 핵심은 1세기 정황이 아니라 바울이 인용하는 신명기 30:14 있다.


    신명기의 저자는 30장에서 하나님의 명령이 하늘 높은 곳도 아니고(12절) 바다 저편에 있는 것도 아니라(13절), 바로 아주 가까운 여러분의 입과 여러분의 마음 속’ 있다(14절) 언급한 있다.  바울은 바로 구절을 그대로 차용했다. 즉, 모세가 율법으로 얻는 의에 대해 말하고는 있지만(롬 10:5), 의는 하늘 위도 아니고(6) 아래도 아니며(7), 아주 가까이, 입과 마음’ 있다(8) 신명기의 가르침을 적용한 것이다. 의를 주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는 주’라는 믿음이다. 신앙을 가까이 있는 우리의 입과 마음으로 대입시킨다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마음으로는 믿고, 입으로는 믿음을 고백한다’ 결론이 자연스럽다. 즉, 입으로 시인하는 문제는 죽을 상황에서 예수를 시인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멀리 있는 율법이 아니라 로마교회의 교인들에게 가까이 있는 믿음의 말씀으로 의를 얻는다는 메시지를 신명기적 신앙으로 표현해 것이다.


    목사가 예를 마태복음 19장의 이혼 논쟁에서도 context 적용의 원리는 같다. 목사가 context 국한성을 비판하기 위한 근거는 여성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당시의 상황이 단락의 context라고 인정함에서 온다.  하지만 당시 여성과 아이들의 인권회복이라는 정황이 이 text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목사도 인권회복이라는 주제가 단락과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예수의 이혼불가 주장은 인간의 사악함을 정면으로 지적하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마태 19장은 처음부터 이혼논쟁의 목적이 예수를 시험에 들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소개한다. 만약 예수가 이혼에 긍정적인 대답을 한다면 이혼의 정당성을 확보하여 그의 평판을 떨어 뜨리는 셈이고, 부정적인 대답을 한다면 모세의 명령에 대치되는 셈이다. 예수는 부분에서 아예 하나님의 본뜻, 창조로 돌아간다. ‘하나님께서 묶으신 것’이라는 것이다. 모세의 허락은 정당성부여가 아니라 너희의 악함’ 있다. 이로써 예수는 바리새파의 시험을 물리쳤을 아니라 이를 위반하는 자들에게는 간음죄’라는 멍에를 부여하게 된다.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이 하나 발견된다. 모세의 이혼증서는 분명 신명기 24:1-3 기록된text이다. 바리새파가 예수를 물고 늘어지는 정당성은 이 text 있었다. 하지만 예수는 그text 너희 마음이 악했기 때문에 허락된 것일 뿐’이라는 context 바리새파의 이혼에 반기를 든다. Context 잘못 오용되는 text 뒤집었을 아니라, 창세기의 창조질서로 돌아가는 새로운 text 해답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그의 글에서, 황목사가 복음의 본질을 훼손한다고 폄하하는 context 엄밀히 말하면 context 아니라 ‘eisegesis(자기해석)’이다.  바리새파의 이혼정당성을 과감히 부숴버린 것처럼,  <꿈은 이루어진다>, <관포지교>, <긍정의 신앙>, <축복신앙> 오늘날 뒤틀린 괴물 기독교를 바로 잡는 길은 건전한 context 이해에서 시작한다. 성서해석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context가 text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context text 분리이다.

     

     

  • sozo 2012.07.23 15:44
    전도사님 반가워요

    이렇게 만날 줄은 정말 몰랐는데..뜻밖이라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도 참 기분좋네

    그리고 댓글에 관해서는 아시겠지만 광고나 음란한 것이 아니라면

    어느 글이라도 환영입니다

    특히 이번 댓글같은 비판적인 시각의 것이라면 더욱 좋아요

    그리고 댓글이 아니더라도 나누고 싶은 것이 있으면 올려주시길..



    전도사님 글을 읽으니까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지만 

    동의가 안되는 부분도 있어요


    1.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정의에 있어서 


    텍스트 안에 숨겨진 것이 맥락이고 그것도 역시 컨텍스트라는 말은 

    텍스트와 컨텍스트에 대한 정의를 내림에 있어서의 차이일 뿐

    맥락이라고 따로 구분을 하고 있으니 어쩌면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만약 맥락이라는 것을 컨텍스트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런데 제가 성경을 진리라고 정의하는 측면에서의 텍스트에는 

    여전히 맥락은 진리의 영역을 꿰차고 앉을 자리가 없어보입니다


    성경이 텍스트라고 말한 건 성경을 진리라는 의미로서 말을 한 것입니다

    성경 안의 활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사실 측면에서 보았을 때 발견되는 오류들에 대한 입장도 따로 있읍니다 


    따라서 맥락을 컨텍스트라고 하고 그 맥락이 성경의 활자 안에서 감추어져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가지고 온 이사야서 34장의 예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사야 34장에서의 짝은 숨겨져 있다기 보다 차분히 읽기만 해도 알게 되는 것이라

    맥락이라는 컨텍스트가 필요하다고 보여지지 않아요

    (물론 이 구절에 대한 오해가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오해는 맥락이라는 컨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이기보다는 성경을 읽지 않아서 생긴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마태복음 18장의 해석도 맥락이라는 컨텍스트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에서 동일해요



    2. 로마서 10:10에 대한 부분은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르게 들리지 않아요

    저는 설교자로서 실제로 1세기의 정황이라는 컨텍스트로 로마서10:10의 텍스트를 

    부수어 버린 실재에 대한 비판을 한 것입니다


    입에 있고 마음에 있다라고 한 바울의 진술은 가까이 있어 입에 있고 마음에 있다고 한 것임은 

    8절에서 말하고 있읍니다

    이미 바울이 형제라고 부른 로마 교회의 유대인들에게는 믿음의 말씀이 전해졌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가까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온 것은 전도사님의 의견과 별다른 충돌을 하지 않는것 같읍니다

    다만 여기서도 한마디 하면 맥락이라는 컨텍스트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전도사님의 비판 중에서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는" 구절의 저의 해석이

    보편적인 신앙고백이라고 하셨는데 조금 의미가 잘못 전달된 것 같읍니다

    누구든지 율법의 행함으로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을 육체가 없음을 바울처럼 저도 믿고

    따라서 율법의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10:1-10 을 보편적인 신앙고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형제들에게 가까이 있는

    믿음의 말씀이 말하는대로 오직 믿음이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읍니다



    3. 마태19장에 대한 문제


    가. 해석의 문제

         전도사님의 해석과 저의 해석은 간음에 대한 경고에 있어서는 일치를 보입니다


    나.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재조정

         모세의 이혼증서 (텍스트) - 마음이 악함(컨텍스트) - 창조질서로 돌아감(텍스트)


         컨텍스트가 잘못 오용되는 텍스트를 뒤집었다는 말은 모순이 있어요 

         오용된 텍스트는 이미 텍스트로서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이예요

         따라서 컨텍스트가 제2의 텍스트로 해답을 제공한다는 논리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여전히 모세의 이혼증서는 텍스트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악함 역시도 컨텍스트가 아니라 텍스트죠

         전도사님의 창조질서라는 새로운 텍스트 역시 새로운 텍스트가 아니라 원래부터 텍스트로 존재했어요


         이 부분은 구약의 율법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율법의 목적은 신명기 6장에 기록이 되어 있읍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참조 신6:1-9)

         그리고 예수님도 동일한 계명을 주셨읍니다

        그래서 계명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계명을 완성하러 오신 것이고

        그 완성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이혼증서 같은 법조문들은 실제로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읍니다

         이것에 대한 해답은 히브리서 10장이 해줍니다

         해마다 늘 드리는 제사로는 온전하게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황소와 염소의 피로서는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율법에 따라 드리는 제사인 첫번째 것을 폐하고

         페한 이유는 두번째 것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두번째 것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로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신명기 6:5대로 아직 살아있으며

         구약의 율법은 법조문으로서는 폐기가 된 것입니다

         (참조: 엡2:15, 골2:14)


         따라서 모세의 이혼증서는 신명기6:5 안에서는 텍스트이고

         바리새인의 시험안에서는 이미 폐기된 법조문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텍스트가 컨텍스트의 힘의 조정을 받아 새로운 텍스트로 탄생되었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다만 해석은 그리 차이가 나지 않고 혹 차이가 난다고 할지라도 그건 컨텍스트의 텍스트에 대한 

         간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4. Context VS Eisegesis

       이건 전도사님이 사용하신 것이 조금 더 정확해 보입니다

       다만 해석의 왜곡으로 만들어진 괴물 기독교를 바로 잡는 길은 건전한 컨텍스트의 이해에서

       시작한다는 말은 위의 경우에서 나타난 것처럼 단지 읽기만 해도 이해가 되는 것들이 부지기수라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저의 신앙 경험을 나누어보면 아시겠지만 저는 교회의 현재에 대해 비판적인 부분이 많이 

       있는 사람인데 교회를 빠진 적이 없읍니다

       이유는 컨텍스트하고 관계없는 말씀 때문이었읍니다

       [히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신앙은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절대로 중요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순종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컨텍스트보다 텍스트를 더욱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 땅콩 2013.07.24 00:30

    해석학적 순환(The Hermeneutical Spiral)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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