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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내맘대로 읽기

2015.09.24 18:52

물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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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정 교수는 일반 신자들은 생소한 생태신학을 전공하시는 분입니다.

일반 기독교 신자들이 잘 접하기 어려운 분야라 소개해 드립니다,

 

(한국에서 열린 wcc세계총회 개회 기도문을 썼다가 보수 교단 총회장들이 숭실대 총장에게 몰려와 교수직에서 쫓아내라고 난리치는 통에 맘 고생 좀 하셨죠. 겸임교수는 전임 교원도 아니고 옛날 말로 시간강사인데.......참고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구교수의 개회기도문은 원래 기도문을 누군가가 불손한 의도로 수정해놓은 것입니다 아마도 에큐메니칼 운동에 반대하는 분의 소행 이겠죠 ^^ 지금도 씩씩하게 잘 활동 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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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신학 (구미정 / 목사, 숭실대 겸임교수)

 

에누마 엘리쉬의 창조 이야기

 

창세기 1장에서 2장 3절까지에 소개된 창조 이야기는 흔히 P(Priesthood)문서에 속한다.

여기서 창조는 먼저 빛과 어둠을 나누는 것에서 시작된다.(창 1:4)

종교적으로 깨끗한/거룩한/정한 것과 더러운/속된/부정한 것을 가르는 데 관심이 많은 사제 집단다운 발상이다. 다시 말해, 빛의 창조는 다분히 신학적인 개념이다.

 

실질적인 의미에서 창조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이튿날 하나님은 물과 물 사이를 나누어서, 창공/하늘이 생기게 하신다. 하늘 아래 있는 물을 하나로 모아, 모인 물을 바다라 하고 드러난 뭍을 땅이라 칭해서, 땅에 각종 식물을 돋아나게 하신 것이 사흗날이다.

 

즉 이번에는 땅과 바다가 갈라졌다. 또 하늘에 해와 달과 별들을 두셔서 낮과 밤을 가른 것이 나흗날이며, 바다와 하늘에 생물을 창조하신 것이 닷샛날, 그리고 땅에 온갖 생물을 두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신 것이 엿샛날이다. 이렛날은 하나님이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휴식을 취하신 날로서, 복된 날일뿐만 아니라 거룩한 날이기까지 하다.(창 2:2-3) 이와 같이 안식일을 강조하는 것에서도 P기자의 전형적인 특징이 잘 드러난다.

 

P의 창조 이야기는 한마디로 바빌론의 창조 이야기를 의식하면서, 또 그것과 대결하면서 나온 것이다. 당시 근동 세계 전체의 메트로폴리탄이었던 바빌론에 억류되어 살면서, 유다 백성들은 해마다 신년 축제 나흗날이면 마르둑 신전 앞에서 제사장이 읽는 <에누마 엘리쉬>를 들어야 했다.

무려 1,100줄이나 되는 이 기나긴 서사시를 바빌론 제사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의 역사관을 알 수 있는 이 창조시(詩)는 태초에 압수(Apsu, 지하수)의 단물과 티아맛(Tiamat, 바다)의 짠물이 서로 섞인 곳에서 세상이 열렸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그곳은 바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하류 삼각주 지역으로, 고대 수메르 문명의 발상지를 가리킨다.

 

물과 물의 결합, 곧 압수와 티아맛의 결합으로 라흐무와 라하무, 안샤르와 키샤르가 태어난다.

 

<에누마 엘리쉬>의 앞부분은 이렇게 신들이 남녀 짝을 맞추어 등장하는 것이 특색이다.

라흐무와 라하무는 침적토로서 여기에 물이 섞여 땅이 만들어진다.

안샤르(하늘의 끝)와 키샤르(땅의 끝)는 지평선으로, 땅과 하늘을 경계 짓는다. 이 2세대가 지난 다음, 안샤르와 키샤르 사이에서 독생자로 태어난 3세대 신이 아누(하늘)이다.

아누는 자기의 모습대로 에아(창조자, ‘누딤무드’라고도 불림)를 낳고, 에아와 그의 아내 담키나가 마르둑(Marduk)을 낳는다.

 

제5세대 신인 마르둑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신들보다 두 배나 힘이 세고 열 배나 지혜롭다고 칭송 받으며, 마침내 온 세상의 지배자로 등극한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에누마 엘리쉬>는 마르둑의 권능과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마르둑 신을 섬기는 사제 집단이 쓴 서사시라고 하겠다. 바빌론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정치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에누마 엘리쉬>를 고안한 바빌론 제사장들은 전쟁 영웅 마르둑을 최고신으로 승격시킨 종교 이데올로기를 통해 그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티아맛을 우두머리로 하는 오래 된 신들은 본성이 수동적이었다. 예를 들어 압수(지하수/아버지)는 땅 속에서 가만히 쉬는 걸 좋아했다. 티아맛(바다/어머니)은 쉽게 흥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한 번 화가 나면 아무도 막지 못할 만큼 엄청난 권세를 휘둘렀다. 몸이 물이었던 그들은 기본적으로 고요함을 즐겼다.

반면에 아누가 이끄는 신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개성이 강했고 활동적이었다. 두 가지 신의 이미지 혹은 세계관 사이의 전면 전쟁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신세대보다 티아맛이 더 강하다고 판단되자, 아누는 가장 젊은 신 마르둑에게 도움을 청한다. 마르둑은 자기가 티아맛을 이기면 다른 신들 위에 군림하는 절대 권력을 넘겨달라고 한다.

 

마르둑이 티아맛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새로운 질서의 시작이었다. 티아맛이 혼란(chaos)을 대표한다면, 마르둑은 질서(cosmos)의 대행자이다. 마르둑은 티아맛을 살해한 다음에 혹시나 티아맛이 부활할까봐, 시체를 “말린 물고기처럼” 둘로 나누어 그 절반으로 창공을 만든다. 티아맛의 눈에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흘러나오고, 젖가슴에서 높은 산이 솟아오른다. 티아맛의 몸은 갈기갈기 찢긴다. 마르둑은 이어 티아맛의 아들 가운데 티아맛을 선동하여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지목된 킨구를 죽여서 그의 피로 사람을 만든다.

사람 창조는 “신들의 노역을 감당시켜서 신들을 쉬게” 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해서 건설된 도시가 바로 ‘신들의 문’이라는 뜻의 바빌론이다.

 

P기자의 창조 이야기

 

위에서 살펴본 대로 티아맛에 대한 마르둑의 승리로 요약되는 바빌론 신화는 전쟁과 폭력, 지배와 음모로 점철된 제국주의 신화이다. 그것은 또한 여신에 대한 남신의 정복과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신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가부장적 신화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P학파는 이러한 바빌론 신화의 영향으로 창조에 대한 신학적 착상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자신들이 경험한 바빌론 제국의 전반적인 특성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창조신학을 형성하였다. 이제 P기자의 창조신학이 바빌론의 창조신학과 어떻게 다른지, 이 글이 관심하는 주제의 범위 안에서 검토해보자. P기자의 창조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창 1:1-2)

 

P기자에 따르면, 태초의 신, 즉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신은 마르둑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이 진술은 엄청난 반전이며 전복이다. 마르둑은 주로 죽은 시신을 가져다가 창조의 원질(原質)로 삼아 피비린내 나는 창조 작업을 수행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는 평화롭게 ‘말씀’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어둠이 깊음 위에 있다고 할 때, ‘깊음’은 본래 ‘깊은 물(트홈, 바다)’을 가리키는 것으로, 티아맛의 그림자가 엿보인다. 한편, 하나님의 영/바람이 물 위에 움직이고 있다고 할 때의 ‘물’은 단물, 즉 강이나 지하수를 뜻한다. 그러니까 “어둠이 짠물 위에, 하나님의 바람이 단물 위에 일고 있었다.”는 묘사는 <에누마 엘리쉬>의 첫 부분과 대단히 유사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넘어선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창공은 물에서 물이 갈라져 나가 생성된 데 반해, <에누마 엘리쉬>에서 그것은 마르둑이 티아맛(바다)의 몸을 갈라 만든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도 남자와 여자 모두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셔서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창 1:28) 위임하시지만, 마르둑이 만든 인간은 남녀 할 것 없이 그저 노예일 뿐이다. (여기서 창세기 1장 28절에 나타난 ‘정복’과 ‘지배’의 관념이 오늘의 생태위기를 초래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기로 한다. 지금은 다만 그 본문의 맥락을 살피는 데 강조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고대인들이 소위 진화생물학이나 우주물리학 같은 체계화된 ‘과학적’ 지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물을 만물의 근원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물은 생명을 낳는다. 모든 생명은 물에서 왔으니까 말이다. P문서보다 훨씬 더 오래된 J문서의 창조 이야기도 땅에서 물이 솟아 온 땅을 적시는 것으로 말문을 연다.(창 2:6) 에덴에서 흘러나온 한 줄기 강물은 에덴을 지나면서 네 줄기로 갈라져 네 강을 이루고, 각각의 강 유역마다 문명을 탄생시킨다.(창 2:10-14)

 

인간의 최초 경험이 모태의 양수라는 사실은 신기하고도 신비롭다.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생물학의 정설이 실감난다. 최근 미국과 유럽 연합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토성 탐사 프로젝트에서 카시니-호이겐스호가 찍어 보낸 사진에 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하여, 과학계가 떠들썩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것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ET>처럼 우리에게 우호적인 존재든지, 아니면 시고니 위버가 주연한 <에일리언>이나 윌 스미스의 <인디펜던스 데이>처럼 적대적인 존재든지 간에, 지구 아닌 다른 별에도 물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지구인의 가슴은 설레는 것이다. 바야흐로 지구신학을 넘어 우주신학으로 나가야할 시점이 아닌가 모르겠다. 이 우주신학에서도 역시 물이 관건이다.

 

한편, 물은 신약성서에서 구원의 은유가 되기도 한다. 우주적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는 공생애에 들어가는 공식 의례로 요한의 침례/세례를 받으셨다. 이때의 물은 죽음과 부활의 성례전적 상징이 된다. 자기 자신을 생명의 물이라 칭한 예수는 “빈들에 마른 풀같이 시들은”(찬송가 172장) 사람들에게 단비처럼 찾아오신다.

 

사마리아 여자 -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만나다

 

요한복음의 주요 신학적 동기는 변화라고 한다. 예수가 세상에 오셔서 한 일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요한복음은 예수의 첫 번째 기적으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사건을 꼽는다.(요 2:1-11) 다른 복음서에서 안식일에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준 일, 곧 치병(治病)을 첫 번째 기적으로 소개하는 것과 사뭇 다르다.(막 1:21-28; 눅 4:31-36 참고)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이 아니라,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 술이 떨어진 혼인잔치의 흥을 깨지 않으려고 그런 것이니, 왜 하필이면 술이냐고 딴지 걸 일은 아닐 성 싶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우리나라 강원도 영월에는 술이 변하여 물이 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름하여 주천(酒泉), 즉 술샘 마을에 얽힌 원인론적 설화이다.

 

옛날에 술이 나오는 샘이 있었다. 그 샘은 용케 사람의 신분을 알아보고 신분에 따라 다른 종류의 술을 내놓는 것이었다. 양반이 가면 맑은 청주가 나오고, 상놈이 가면 텁텁한 탁주가 나왔다. 하루는 그 마을에 살던 상놈 하나가 양반의 청주를 마시고 싶어 꾀를 내었다. 양반 행세를 하고 가면 몰라보겠지……. 그는 어렵게 양반 옷을 갖추어 입고, “어흠! 어흠!” 양반 목소리까지 흉내 내며 양반걸음으로 술샘에 다가갔다. 하지만 이게 웬걸? 역시 나오는 건 막걸리였다. 상놈은 그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상놈의 신분으로 태어난 것도 억울한데, 술샘까지 자기를 알아보고 차별을 하다니……. 상놈은 들고 있던 작대기로 술샘 구멍을 마구 쑤셔댔다. 그랬더니 그 뒤로는 술 대신에 물만 나오더라는 이야기.

 

하기야 술값은 천차만별이 아닌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술은 2001년에 스코틀랜드에서 수입되어 아직까지 주인을 만나지 못한 ‘글렌피딕 50년산’으로, 그 값이 무려 8,500만 원이라고 한다. 막걸리 한 사발에 세상 시름을 달래는 서민들이 들으면 정말로 ‘술맛 떨어지는’ 소리가 아닐 수 없을 게다. 그러니 신분에 따라 다른 종류의 술을 내는 술샘은 그 자체가 타락일 수밖에.

 

인간을 구분지어 놓고 계층간 불화와 갈등을 조장하는 술샘은 마땅히 붕괴되고 해체되어야 하리라. 중요한 것은 양반이 그 역할을 떠맡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득권자는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상놈, 그 중에서도 기존의 불평등한 체제에 의문을 품고서 평등해지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나서는 상놈에게 희망이 있다. 술샘 마을의 그 상놈은 기존 질서에 도전했고, 마침내 술샘을 물샘으로 바꾸었다. 술이 아니라 물이 솟아나는 샘은 더 이상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양반에게나 상놈에게나 똑같은 물을 낸다. 이로써 술샘 전설은 구원의 비전을 담지하게 된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물이라 부르셨다. 물은 언제나 낮은 곳을 향해 흐른다. 갈릴리 출신의 예수가 갈릴리보다 더 낮은 곳 사마리아로 흘러 들어가신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마을에 이르셨다. 이 마을은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곳이며, 야곱의 우물이 거기에 있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피로하셔서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오정쯤이었다.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왔다.(요 4:5-7)

 

물로 오신 예수가 공교롭게도 우물가에서 한 여성을 만난다. 오랜 차별과 멸시로 인해 가슴에 못이 박힌 여성이다. 그림 상으로는 유대 남자와 사마리아 여자 사이의 만남인데,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넘길 장면이 아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과거 남북 왕조 시절에 북이스라엘을 점령했던 앗수르의 이민정책에 의해 강제로 혼혈이 되었다. 그래서 순혈주의(純血主義)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에게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 뜰을 밟을 수조차 없었다. 조상들의 불행했던 과거사 때문에 모든 사마리아 여자들은 유대 남자들로부터 ‘색을 밝힌다’, ‘부정 탄다’, ‘재수 없다’ 등의 악의적인 욕을 먹어야 했다. 유대 남자와 사마리아 여자 사이의 인격적인 만남이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우물가의 이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말을 건 것이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요 4:9) 여자는 당돌하게도 남자의 요구를 묵살한다. 그럼으로써 유대인의 가소로운 순혈주의를 비웃으며 감히 그것에 도전한다.

 

사실 이 여자는 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우물이야말로 마을 여자들의 수다방으로 온갖 정보가 교환되는 공공장소일 터, 보통 여자 같으면 여럿이서 우르르 몰려가는 쪽을 선호할 것이다. 물 길으러 가는 시간은 대개 선선한 이른 아침이나 저녁 무렵이 일반적이지 않은가? 가부장제가 지엄한 땅일수록 튀는 행동은 금물! 가급적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집단행동을 해야 조신한 여자로 보일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완전히 단독행동이다. 한낮에, 그것도 혼자서 물 길으러 간다. 주체성이 강한 캐릭터인 것 같다.

 

예수와 나누는 대화에서도 그 여자의 됨됨이가 잘 드러난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요 4:20) 못 말리는 민족의식이요, 못 말리는 저항의식이다. 사람을 갈라놓고 차별하는 체제가 종교마저 갈라놓았음을 고발하고 있다. 예수와 이 여자 사이의 차원 높은 대화는 점진적으로 무르익어 간다. 그에 앞서 3장에서 바리새파 지도자라고 하는 니고데모가 예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 거의 평행선을 달렸던 것을 생각하면, 4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글자 그대로 주거니 받거니 죽이 착착 맞는 대화임에 틀림없다. 니고데모는 아직 밤(요 3:2)에 살지만, 이 여자는 낮(요 4:6)에 예수를 만나 마침내 빛이 어둠을 몰아내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요 3:21) 예수는 이 똑똑한 여자에게 자기가 메시아인 것을 숨기지 않으시고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요 4:26)하고 드러내신다.

 

니고데모하고는 대화가 안 되는데, 사마리아 여자하고는 왜 될까? 니고데모는 여전히 눈이 열리지 않았는데, 사마리아 여자는 어찌 진리를 볼까? 니고데모는 기득권자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할 때 아는 것이 많은 이스라엘의 선생이기 때문이다. 그가 예수의 말씀을 알아들으려면, 자기의 앎부터 비워내지 않으면 안 된다. 진리는 깨끗한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법! 다석 유영모의 말마따나 ‘깨끗’이 ‘깨끝’을 뜻한다면, 니고데모는 아직 깨져서 끝장나 본 경험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깨닫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도 그는 부자 청년(마 19:16-22)에 비하면 훨씬 낫다. 그이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해 근심하면서 예수를 떠나갔지만, 니고데모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이나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풍습대로 예수를 모셨다(요 19:39-40). 늦게나마 숨은 제자 노릇을 톡톡히 감당한다.

 

반면에 사마리아 여자는 철저히 밑바닥 인생이요 주변부 인생이다. 게다가 성서의 보도대로라면 그 여자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고 한다.(요 4:18) 당시 사회에서 여자가 이렇게 화려한(?) 결혼 경력을 가지고도 버텨낼 수 있었던 점, 게다가 그 동네 사람들이 그의 말만 듣고도 예수께 나아올 정도로 그의 신임이 두터웠던 점(요 4:39-42)을 생각하면, 어딘가 아귀가 안 맞는다 싶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확대 해석을 자제하고 그냥 넘어가 보기로 한다. (어떤 이는 여기서 ‘남편’이 삶의 중심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이 여자는 전에는 권력, 명예, 재물, 건강, 가문 등 소위 세속적인 것들로 삶의 중심을 삼아 보았지만, 다 부질없음을 깨닫고, 이제 새로운 중심, 곧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여정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심 산에서 드리는 산당제사로는 만족스럽지가 않기에, 예수는 지금의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고 비유적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예수는 이 여자의 타는 목마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다는 점이 중요하다. 괜스레 물을 달라고 말을 건 것도 사실은 ‘내가 너에게 물을 주고 싶다’는 반어적 표현이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요 4:14)

 

야곱의 우물은 어쩌면 전통 또는 정통의 이름으로 인간을 옥죄는 구시대적 이데올로기일 지도 모른다. 그런 물은 우리의 갈증을 채워주기는커녕, 계속해서 우리를 목마르게 한다. 마르크스(Karl Marx)가 비판한 ‘마약’같은 물이다. 의존을 강요하고 중독시키며 노예화하는 물. 그러나 예수가 주는 물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한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의 물은 ‘마시는 사람 안에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물은 내 안의 샘물을 깨우는 한 바가지 마중물과도 같다. 더 이상 밖에 있는 물을 길으러 다니지 않아도 된다. 내 안의 샘물이 밖으로 흘러넘치니, 나 자신도 목마르지 않거니와, 남도 풍성하게 나누어줄 수 있다.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자비한 물이다.

 

밖이 아니라 안에서 찾으라는 말은 불교에서 말하는 “기우경멱우(騎牛更覓牛)”를 연상시킨다. 소를 타고 있으면서도 다시 소를 찾는 어리석음을 빗댄 말이다. 하나님은 밖이 아니라 안에 계신다. 만물은 하나님의 품 안에 있으므로, 하나님에게는 아예 ‘밖’의 개념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에게 어서 그 물을 달라고 간청한다. 이 여자의 미덕이 바로 여기에 있다. 새롭고도 낯선 진리 앞에 자기를 개방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결단하지만, 고집을 부리거나 집착하지는 않는다. 마치 물이 어떤 그릇에 담겨도 그 형태에 따라 변화무쌍한 모양새를 띄듯이, 사마리아 여자도 아상(我相)에 사로잡히지 않는 유연성을 보여준다. 물동이까지 버려둔 채 마을 사람들에게로 달려가는 여자의 모습은 한 줄기 강물처럼 힘차고 역동적이다.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바야흐로 변화의 바람이 불어온다. 자기 안의 샘물을 발견한 한 여자로 말미암아 죽음의 땅에 생명의 강이 흐르게 된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해피엔딩이다.

 

‘치히로’의 영성 - 관계와 관계 사이에 물처럼 흘러

 

물이 많이 등장해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주인공의 성격이 물의 영성을 구현하고 있어 소개하고픈 영화가 있다. 일본의 마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만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다. 열 살 소녀 치히로가 우연히 요괴들의 온천장에 오게 되면서 벌어지는 모험담을 다루고 있다. 치히로는 부모 때문에, 정확히 말하면 돼지로 변해 버린 부모의 탐심 때문에 온천장에 갇히게 된다. 어린이의 노동력마저 가혹하게 착취하는 온천장의 풍경이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질서 아래 평정된 현대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한다면, 치히로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그런 시대 상황 속으로 내던져진 어린 세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소녀는 이제 부모를 구해내서 온천장을 빠져나갈 책임을 떠안았다. 어떻게 이 과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인가?

마녀는 치히로에게서 본래 이름을 빼앗고, 대신에 새 이름 ‘센’을 부여해준다. 정체성 말살의 통과의례인 셈이다. 치히로는 ‘천 길’, 즉 천 길 낭떠러지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헤아릴 수 없이 깊고 그윽한 세계를 의미하지만, 센은 단순히 숫자 ‘천’을 의미할 뿐이다. 철저하게 수량화된 자본주의 사회를 풍자하는 것으로 보인다. 연봉이 얼마이고, 아파트 평수가 몇 평이고, 자가용 배기량이 몇 cc이고, 등등에 따라 인간의 등급이 결정되는 맘몬 숭배의 시대를 비꼬는 것 같다. 그런데 처음부터 센의 은밀한 조력자로 나오는 하쿠는 센에게 본래 이름을 잊어버리면 그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일러준다. 자기도 이름을 잊어버려서 마녀의 하수인으로 붙잡혀 있다고.

 

본래 이름, 그것은 곧 본연의 정체성을 의미할 것이다. 기독교적으로 풀이하자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센으로 불리는 치히로는 본래 이름을 기억하려고 애쓴다. 모두들 경계하고 따돌리는 하쿠를 친구로 사랑하고 믿어주는 것, 첫 손님으로 일명 ‘오물’ 신이 배정되어 똥물을 뒤집어쓰게 된 상황에서도 정성을 다해 오물신을 닦아주는 것, 황금을 뿌려대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가오나시(얼굴 없는)’ 신 앞에서도 황금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나가는 것 등이 치히로가 자기 이름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치히로는 누구를 만나도, 그 상대가 자기를 이롭게 하든지 해를 입히든지에 상관없이 마음을 나눈다. 편견도 없고, 차별도 없으며, 욕심도 부리지 않는다. 이래서 노자는 도를 갓난아이에 비유한 모양이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도 어린이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시며(마 18:5; 막 9:37; 눅 9:48),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마 18:3; 막 10:15; 눅 18:17) 선언하셨다. 한낱 어리고 연약한 소녀일 뿐인데, 그런 치히로에게서 생명을 치유하고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흘러나온다. 하쿠의 본래 이름을 기억나게 해서 그가 왔던 강으로 돌려보내고, 오물 신을 정화(淨化)시켜 근사한 강의 신으로 거듭나게 하며, 가오나시 신에게 스스로 황금을 포기하게 만들고, 돼지로 변해버린 부모를 구원하고, 마녀마저 회개시켜 온천장의 노예일꾼들을 풀어주게 한다. 치히로는 마치 관계와 관계 사이를 흐르는 물 같다. 그를 만나면 모든 생명이 저마다 꽃을 피우며 살아난다.

 

세상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여린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단단하고 힘센 것을 물리치는 데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습니다.

이를 대신할 것이 없습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기는 것

세상 사람 모르는 이 없지만

실천하지는 못합니다.……(도덕경 제78장)

 

분별심이나 경쟁심이 없으니 다툼이 있을 리 없다. 불교의 금강경에 나오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곧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이 바로 물의 원리인 것이다. 한없는 부드러움으로 상대방을 어루만지고, 한없는 약함으로 상대방을 무장해제 시킨다. 물은 이렇게 흐르고 흘러서 천지만물을 변화시킨다.

 

불이 남성적 은유라면 물은 여성적이다. 노자는 이러한 물의 특성을 도에 비유하여, “만물의 어머니(萬物之母)”라 이름 붙였다. 도덕경이 가르치는 삶의 자세는 한마디로 “물같이 되라”는 것이다(上善若水).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르기 때문에, 도(道)에 가장 가깝다. 제국주의적 힘의 논리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노자는, 그리고 예수는 어머니 같은 포용성과 갓난아이 같은 부드러움으로 물처럼 살라고 우리를 깨우친다.

 

죽음의 사막과 생명의 오아시스를 가르는 유일한 기준은 물이다. 물의 영성은 우리를 영원한 오아시스로 초대한다. 공자 왈, “근원이 없는 샘은 이내 말라버리지만, 깊은 샘에서 솟아 나온 물은 밤낮 없이 흘려 내려서 낮은 곳을 다 채우고 마침내 바다에 이른다.”고 했다. 예수라는 물을 마신 사람은 자기 안에 깊은 샘을 가져야 한다. 그가 맺는 모든 관계에서 생수가 흘러넘쳐야 한다. 흐름의 방향은 언제나 낮은 곳이다. 그 길 끝에 바다가 있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하여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는 평화 세상이 열린다.(사 11:9)

 

조갈증에 신음하는 우리, 밖에서 찾지 말고 안에서 찾으라는 예수의 말씀을 언제까지 못 들은 체 외면할 것인가? “선생님, 그 물을 나에게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게 해주십시오.”(요 4:15) 준비된 제자, 이름 모를 사마리아 여인의 씩씩한 대답이 새삼 그립다.

 

[기독교사상, 2006.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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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신도분들은 생소하실까봐 구교수 글에 몇가지 설명을 붙입니다

  에누마 엘리쉬 신화는 기독교 신학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중근동 신화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이 쓰여지고 편집된 이유가 바빌론 포로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잇기 때문입니다.

  도시국가에서 시작한 바빌론이 중근동을 장악하고 거대 왕국이 된 이후 중근동에서는 B급 신에 불과한 자신들의 주신(主神)인 마르둑을 최고신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 바로  에누마 엘리쉬 신화를 만드는 작업엿고 마르둑에 대응하기 위한 유대인들의 작업이 구약(특히 창세기)의 편집였습니다,

 

  ( 에누마 엘리쉬 신화(마르둑 신화)는 제대로 된 신학대에서는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이고

  재미있는 것은 70년대 학번들까지는 '말둑'으로 배웠고 80년대부터는

  '마르둑'이라고 음차가 바뀌는 바람에 뭐라고 쓰냐에 따라 대충 학번을 알수가 있습니다  ^^)

 

  • sozocom 2015.09.30 01:05
    와우~ 구미정 교수의 "물의신학" 잘 읽었습니다.
    작은자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유익한 수요일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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