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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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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편에서 바르트의 대략적인 분위기는 아셨을 것이고 이번 편부터 바르트의 신학사상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교회교의학 전체를 다루기는 좀 방대하고 주제별로 중요한 포인트만 정리하겠습니다.

앞편에서도 간략히 설명드렷지만 당시 유럽 신학계의 주류는 자유주의 신학입니다.

바르트는 주로 자유주의 대척점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전통적 신학을 다시 정립하는 역할을 하지만 자유주의 또는 성서비평을 부정하지 않는 입장이라는 것을 먼저 의식하고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근본주의적인 설교와 성경공부에 익숙한 한국교인들이 받아들이는데 어려운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바르트의 신학은 시기마다 조금씩 다른 부분도 있고 교의학이 쓰여지는 40여년간에도 약간씩 다른 부분이 있고(전번 편에서 설명 드린 것처럼 교의학의 초기에 쓰여진 부분에서는 자연신학을 부정하지만 후반부에 가서는 인정하는 듯한 표현을 하고 있고 구원론에 대해서도 교의학 앞부분에는 교회밖의 구원을 절대 부정하지만 후반부에는 인정하는 듯한 표현을 하고 잇습니다)주제에 대해서도 완전히 다루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앞부분에 다루었던 주제를 뒷부분에 다시 다루는 등 전체를 봐야 특정 주제에 대한 전체적인 조명이 가능합니다.

장신대에서도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을 가르치면서 책의 순서인 서론, 신론, 창조론, 화해론, 종말론 순서로 가르치지 않고 계시론, 예정론, 신론, 창조론, 화해론, 윤리학순서로 강의를 하고 잇습니다.

저는 신론(예정론), 창조론, 계시론, 화해론, 윤리론 순서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신론에 예정론을 포함 시킨 것은 제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바르트의 神觀이 바로 예정론(구원론)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제 개인적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분도 계시겟지만)

 

(중간 중간 괄호안에는 바르트가 표현한 독일어를 그대로 옮겨 드렸고(영어 아니어요 ^^)중간 중간 성서 구절은 장과 절만 올려드릴 예정이니 각자 찾아보시는 수고를 하셨으면 합니다. 구절 자체를 올려드릴까 하다가 찾아 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네요. 바쁘셔서 성서읽으실 시간 없을 텐데 찾아서 각자 읽으시면서 성서 해석도 해보세요/사실 기독교인들 성서 잘 않읽으시는 이참에 읽어 보세요. 성서에 먼지도 좀 털어내고..... 그리고 공부는 너무 쉽게 하는 것 아니어요 ^^)

 

Screenshot_2016-01-11-15-17-40-1.png

 

 

- 神 論 -

 

- 신은 누구인가?

 

바르트의 신관을 정의하면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세상의 세상이다’그리고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세상은 세상이라는 신관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적 의미이고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주장은 근본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입니다,.

 

'하느님은 전적 타자(der ganz andere)'는 바르트가 구호처럼 주장하는 용어입니다.

당시 자유주의 신학의 주장은 모든 역사, 문화, 철학에는 신성이 존재하고 이 신적인 존재가 인류를 발전시킨다는 주장을 거부하고 역사, 문화, 철학에 신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인류발전

에 따른 유토피아 건설은 허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잘못 읽으면 하느님이 세상을 주관하신다는 의식에 사로 잡혀있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급속히 발전해 나가는 인간의 산업혁명과 풍요로 이뤄지는 세상이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는 선포이고 자유주의신학에 대한 도전입니다.

 

산업혁명과 대량생산의 수혜자로 인류 최고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 인본주의를 극대화시켜 나가던 1,2차 대전 이전에는 인간이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다는 인식이 강했고 이때 유행한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이고 인본주의가 강조된 자유주의 신학은 다원주의적 성격을 포함하고 잇습니다. 하느님 보다는 인간의 이성이 우위를 가지게 되고 인간이 만들어가는 역사, 문화, 철학 자체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자유주의 성향의 신학을 부정하는 주장입니다.

(이해가 되실지 모르겠네요 ㅜㅜ)

 

- 구원받을 인간은 예정 되어 있는가? (신은 자유 주권자이냐 사랑하는 자냐)

 

하느님의 자유와 주권만을 강조하게 한 칼빈의 예정론에 대해서는 칼빈의 예정론을 그대로 받아 들인다면 칼빈의 하느님은 독재자에 불과하고 변덕쟁이 우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잇습니다.

바르트는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을 중시하면서 예수로 표출된 하느님은 지옥에 가는 단 한사람을 구하기 위해 영원히 노력하시는 분으로 설명하고 잇고 칼빈주의 예정론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하느님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장로교에서 싫어할만 하죠 ^^)

바르트는 칼빈을 비판 하면서 자유, 주권보다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der liebende) 을 강조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유는 사랑을 위한 자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유로운 행위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즉, 하느님의 사랑과 자유는 하나이고 지옥에 가는 것을 기뻐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와 같은 것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르트는 예정론을 중요한 논제로 다루고 있고 교의학에서 1/10이상을 예정론에 대해 논하고 잇습니다)

혹시 바르트가 구원론이 예정론이라는 이야기를 들으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인간은 구원 받을 놈 구원 못 받을 놈으로 태어날 때부터 예정되어 있다는 주장이지만 바르트는 창세이전 인간을 창조하면 타락할 것을 알고 예수를 보내 구원을 이루겠다고 예정해 두셨다는 의미의 예정론이고 예수를 통해 만민을 구원하시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베소서 1장 4절)

 

- 심판자 하느님??? 글쎄

 

정통주의 신학에서는 하느님을 사랑(자비)과 義로 규정하고 사랑은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義는 보통 심판자라는 인식을 하도록 주장해왔지만 바르트는 사랑과 의는 하나이고 사랑이 없는 의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율법도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고 십자가 사건이 사랑의 극대화이며 하느님의 의 자제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에게 자애로우시다’ 그리고 심판은 하느님이 원치 않는 것이고 심판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완전히 우리에게서 해결된 것인다 라는 것인데 당시에도 많은 논란을 가져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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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에서는 예정론을 감리교에서는 의지론을 주장하는데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전지전능하시고 불변하신 하느님이라면 예정론이 맞는 것일까요?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아시고 주관하는 하느님이기 때문에 누구나 태어나기 전부 구원을 받을지 못 받을지 알고 계신다는 예정설이 맞을까요? 고민해 보세요 ^^

 

황목사님이 제가 살살빠져 나간다고 하시기에 제 의견을 말한다면 성서에서 이야기히는 신의 불변성은 진리에 불변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밀해제에서 영훈씨가 성서인문학이 분위기가 너무 좋다고 하셔서 오늘은 논란될 만한 이야기좀 해야 겠네요 ^^)

 

성서가 이야기하는 불변성은 진리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지옥갈 놈을 딱 정해놓고 변하지 않는 다는 불변성이 아닙니다.

또한 창세기에 이야기 하듯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신과 관계성을 가지게 됩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신과의 관계성 속에서 유동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성서를바르게 읽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전지전능하시다는 것도 성서에 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모스 7장 3절을 보면 이스라엘을 징벌하겠다는 하느님에게 ‘용서해 주십시오. 야훼께서는 그만해 두겠다 하시면서 당신의 뜻을 돌이키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6장을 보면 하느님이 구체적으로 한 민족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개울까지 치도록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를 구하자 자신의 계획을 바꾸어 징벌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잇습니다,

全知와는 거리가 있는 구절입니다.

 

*기왕 욕먹는거 한발 더 나가면 마모스 7장3절의 ‘당신의 뜻을 돌이키셨다’를 메타노이아(μετανόια)로 쓰고 잇는데 메타노미야는 한글성서에는 회개라고 번역하고 잇습니다.

마태복음의 ‘회개해라 천국이 가까왓다’에서 회개가 메타노이아의 명령형인 메타노에이테(μετανοειτε - λεγων μετανοειτε ηγγικεν γαρ 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입니다

 

한국식으로 해석하면 야훼께서 회개했다는 의미가 되겠죠

즉, 메타노이아는 회개라고 하기 보다는 회심 마음을 바꾸다가 맞지 않을까요?

하느님이 회개하실 수는 없으니까요

즉, 야훼가 메타노이아를 하셨다는 것은 야훼가 죄를 회개햇다는 의미가 될수 없고 죄와 상관 없이 마음을 바꾸었다는 뜻이라면 회개해라라는 말도 죄와 상관없이 마음에 방향을 바꾼다고 봐야지 않을 까요?

(성서 전체를 보면 죄에서 마음을 바꾼다는 회개의 의미로도 쓰이고 죄와 상관 없이 마음을 바꾼다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즉 죄가 있고 없고 상관없이 쓰입니다)

 

(일전에 어떤 논문을 보니 공부 좀 했다는 일부 목사님들의 경우 메타노미야의 경우 회개라고 번역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고 하느님이 메타노미야 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신약에 두 번 나오는 strephein(στροφος)을 회개와 연결시켜 이야기하는 경우가 잇는데 strephein(στροφος)는 물체적 뒤집힘을 의미하는 것이고(예수의 부활을 알고 마리아가 무덤에서 되돌아 나온다라는 경우 쓰여짐 요한 20.1)용법이 맞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헬라어로 kata를 어두에 붙일 경우 파국을 의미하는데 문장과 단어의 과도한 해석 확대는 왜곡을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맘에 들지 않으면 2천년전 쓰여진 헬라어 성서 원문까지 변개시키려는 위대한 한국 먹사들)

 

그렇다면 회개의 의미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적응 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방향을 바꾼다. 즉, 가는 방향이 맞든 틀리든 죄가 있든 없든 상관 없이 방향을 틀어 하여 예수의 공의를 향한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원죄론과 연계하여 회개를 죄를 용서받기 위한 것으로만 자꾸 등치시키는 데 성서을 자세히 읽어보면 죄의 용서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라는 용어로 자꾸 교인들을 죄인 취급하는 것은 아닐까요?

너희들은 죄인이야(채찍)그러니 회개해 그리구 교회도 나오고 헌금도 해(댓가) 그러면 구원을 해줄게(당근) - 잘짜여진 사기 같지 않습니까? 중세 수천년 사기를 치고 아직도 사기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은혜는 값없이 주는 것인데............

 

* 참고

카톨릭 용어사전을 보면 ‘회개란 죄스런 생활 태도에서 탈피하여, 하느님께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길을 바꾸다’, ‘돌아오다’라는 뜻으로, 구약 시대는 악을 피하고 하느님께 향하는 행위, 생활 방식을 바꾸어 생활 전체에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는 행위를 말하였다.

하느님께 귀의하여 실제 생활을 개선하는 것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에피스트레포(Epistrepho), 즉 내적 방향의 전환을 나타내는 메타노이아(Metanoia)와 같이 사용하였다. 메타노이아는 불신을 버리고 신앙을 가지며, 죄를 끊어 버리고 덕행을 실천하는 전인적인 변화를 말한다‘라고 설명하고 잇습니다.

카톨릭 사전에서는 에피스트레포와 메타노이아를 회개라고 이야기하는 에피스트레포(ἐπιστρέφω)는 외적변화를 메타노이아는 내적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한글 성서에는 에피스트레포는 돌이키다로 번역되지 회개로 번역된 부분은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혹시 있으면 어쩌징 ㅠㅠ)

예를 들면 행전 3장19절을 보면 ‘그러니 여러분은 회개(메타노이아)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시오(에피스트레포).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실 것이며

(μετανοησατε ουν και επιστρεψατε προς το εξαλειφθηναι υμων τας αμαρτιας)

 

또 쓸데없는 이야기 하다가 옆으로 나갔네요 ㅜㅜ

한글 성서에 메타노이아의 번역을 보면 대부분 죄와 관련된 부분은 회개라고 번역하였고 죄와 관련되지 않은 부분은 돌아서다는 의미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에 회개로 번역된 부분은 대부분 죄의 뉘우침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원래 단어의 뜻 자체는 죄와 상관없는 가치중립적인 단어이라는 이야기를 너무 길게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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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불변성

 

칼빈주의 예정론은 신의 불변성과 함께 신은 예정하신 것을 변경하지 않으시고 모든 세상은 하느님의 계획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바르트는 ‘신의 불변성 돌맹이 같은 무감각, 無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신은 살아계시고 살아계신다는 것은 신과 피조물의 관계속에 만남이고 역사이다’라고 선언합니다.

만약에 기계적으로 계획된데로 프로그래밍된 것처럼 세상이 움직인다면 기도도 필요없고 모든 인간의 (종교적)행위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유를 근거로 신자의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결정하심이 존재한다‘

‘인간의 기도는 하느님의 계획과 의지 속에 포함된다’

‘하느님의 계획은 인간의 기도보다 앞서기도 하지만, 또한 인간의 기도에 뒤따르기도 한다’

‘하느님께서 은혜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자비하시고 의로우시고 오래 참으신다는 것, 곧 하느님의 삶과 인격은 영원히 불변한다’

 

비르트가 이야기하는 신의 불변성은 '신의 인격성의 불변'을 의미하고 인격성의 불변이란 것은 사랑, 은총, 약속과 같은 것들의 불변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자비하시고 의로우시고 오래 참으신다는 것, 곧 하나님의 삶과 인격은 영원히 불변한다."

 

- 하나님의 전능

 

바르트는 하느님의 전능에 대해

‘하느님의 전능함 이란 자기에게 반역하는 자를 벌주시고 심판하고 물리적 힘으로 승리해서 자신의 전능한 힘으로 정복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할 수 없는 사랑과 거대한 은총의 힘으로 승리하신다. 그의 능력은 멸시받음과 순종 속에 나타나고 있다. 만군의 주님께서 승리하시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느님의 능력은 십자가의 능력이고 십자가 속에서 나타난다’

인간에 대한 위대한 사랑 때문에 인간을 해치지 못하는 신이 바로 십자가에 계시되어 있다.

이것을 '무능함 속에 있는 하나님의 전능'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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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론 -

 

창세기의 이야기는 신화일까 역사일까요?

비르트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사화(sage/史話)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계약이 창조의 내적 근거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잇습니다.

 

- 사화란 뭘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독일어 sage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여성격으로 전설, 구전, 영웅 전설, 소문, 풍설 등으로 나와있지만 바르트가 이야기하는 sage는 신화(mythus)와 구별되는 의미로 쓰고 잇습니다.

즉, 역사성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역사성을 내제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야기하고 잇습니다.

그러나 바르트가 이야기하는 역사성이란 우리가 이야기하는 역사 historis가 아니고 geschichtefh 설명하면서 일반적인 히스토리는 인간들 사이에 일어난 사실이지만 자신이 이야기하는 역사성이란 신과 인간, 초월적인 역사성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인간들간에 나타나는 사실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초월적 신과 인간의 관계속에 나타난 실제적 사건을 싯적, 문학적,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혼돈을 질서로 무생명을 생명으로 창조하는 신의 초월적 행위의 역사를 문학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제가 바르트를 이해하기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르트는 창세기의 성서비평적 시각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지리적 배경으로는 홍수에 시달리던(파괴) 중근동의 역사적 배경이 물을 궁창에 가둔다는(질서와 구원)표현를 하게 하였고

종교적 배경으로는 바벨론의 창조 설화인 에누마 엘리쉬를 비롯한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러한 당시 신화를 극복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참조 : 자유게시판에 제가 물의 신학 하단에 약간의 설명을 해놓습니다)

 

- 계약은 창조의 내적 근거이고 창조는 계약의 외적 근거이다???

 

신의 세상과 인간의 창조는 사랑이고 사람과 사랑이 공존하기를 원하셨고 사람이 신과의 사귐(관계 맺기)를 원하셨고 이 사랑이 예수에게 계시되었고 예수안에서 하느님과 사랑을 완성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주장합니다.(써놓고 보니 약간 헛갈리는데 이해되세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의 시작이자 목적이됩니다.(에베 5장 23-33)

바르트의 창조론의 특징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를 이야기하고 있고 이러한 주장은 전통적인 신학이나 자유주의 신학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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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둑신의 전쟁을 묘사한 중근동 부조)

 

- 계시론 -

 

제가 성서분석 편에서 이야기해서 이해하신분들도 계시겠지만 성서의 ‘계시’는 미래를 점치는 것이 절대 절대 아닙니다.

 

비르트는 하느님의 계시는 예수그리스도라고 주장합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나타내셨고(고후 5장19)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모든 것이고 예수 외에 어떤 것도 하느님의 계시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계시이고 이것으로 충분한데 다른 무엇이 필요없다는 것이죠

(예수외의 어떤 것도 하느님의 계시가 아니라는 주장은 아마도 당시 히틀러를 세속적 메시야로 선포한 독일 교회에 대한 반발이 신학적 주장으로 굳어진 것은 아닐까요?)

 

아마도 바르트의 삼중양태 이야기를 들어보신 분들이 많이 있으실 것입니다.

특별한 것은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은 세 가지 형태로만 나타난 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단 하나인 하느님의 계시)

둘째는 성서 (형태는 세상적이고 모순이 있지만 본질은 하느님이다)

셋째는 교회의 선포 (교회의 선포(verkundigung)는 교의(dogmatik)와 설교(predigt)로 나누는데 교의는 선포의 내용(was)라 할 수 있고 설교는(wie)선포의 한 방법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바르트가 후반부에 쓴 화해론에서는 ‘세가지 형태로만 나타난다’가 아니고 ‘세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교회밖에 ‘존재하는 빛들’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교회 밖에도 진리와 말씀이 잇을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성서에 대해서는 과거 정통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서무오류(성서영감론)를 반대하며 무오류라는 주장은 증언자(성서의 기록자)가 오류를 가진 인간이고 그 인간ㅇ의 인간적 증언이기 때문에 당연히 오류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오류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불완전한 인간의 증언이지만 하느님의 계시가 담겨잇다고 주장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주류이던 당시 이러한 주장은 획기적인 것 였고 바르트의 과거 스승엿던 자유주의 신학자 하르낙과 이 문제로 신학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바르트는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지만 오류는 남는다 그래도 하느님의 말씀이다라는 입장이지만 한국 신학계에서는 이러한 입장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근본주의적 칼뱅주의자인 박형룡목사는 성서에는 일획의 오류도 잇을 수 없고 상호모순도 잇을 수 없다 오류로 보이는 것은 그냥 인간이 어려워서 이해하지 못하는 난제일뿐이라고 주장합니다. (모순점 백가지는 보여줄수 있는데 돌아가셔서 보여드릴수도 없고....)

 

성서비평학에 대한 바르트의 입장을 에를 들어 보면 네복음서의 쓰여진 역사적 배경을 찾아내고 네복음서의 모순된 부분중에 어느 부분이 사실에 가까운지를 밝히고 연구하는데 그쳐야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주제넘은 판단까지 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입니다.

또한 우리가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몰랐던 기록의 배경과 쓰여진 원래의 원인을 밝히는데 공헌을 햇지만 성서의 본질까지 거드려서는 않된다는 입장이지만 또한 나타난 성서의 오류와 상호모순까지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초대교회의 정경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도성입니다.

그러나 현대에 밝혀진 바로는 베드로 후서는 베드로의 저작이 아니고 요한계시록도 요한의 작품이 아니고 에베소서, 히브리서 등은 바울의 저작이 아닌 것으로 거의 밝혀졋는데 정경에서 빼야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루터 역시 종교개혁 당시 야고보서, 요한 2, 3서와 계시록을 정경에서 제외시키자고 주장햇는데 도데체 성서는 어떻게 취급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바르트는 사도성이 없더라도 문서 자체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면 성서로 무방하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바르트는 요한계시록에 대해서는 차라리 성서에서 빼버려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제가 소개해드렸던 디다케나 디오그네투스의 편지를 성서에 포함시키는 것도 고려해 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성서를 정하는 주체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햇지만......)

 

- 자연신학과 사회운동에 대한 바르트의 입장

 

일단 자연신학을 알아야겠죠?

자연신학은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 했기 때문에 예수와 상관없이 자연탐구를 통해 진리를 알수 있고 하느님을 알수 잇다는 계몽주의적인 신학입니다.

로마서 1장 20절, 시편 19편 1절을 보면 천지창조로 지어진 세상 자체가 하느님을 나타내고 증거하고 그러므로 자연의 연구로 하느님을 찾을 수 있다는 자연신학의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러한 자연신학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상 모든 창조물이 하느님을 증거하고 있지만 이러한 증거어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 자연에서 우상을 만들고 하느님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하느님께 나갈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 합니다.

 

사회주의 운동, 여성해방운동, 평등 인권운동에 대해서도 그 자체가 인본주의적으로는 바른 방향이지만 히느님이 속 속에 계시지 않는다면 그냥 죄악일 뿐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쓰여진 화해론에서는 세상밖의 빛을 이야기하면서 불완전하지만 교회밖(자연 사회운동 등)의 진리의 가능성도 부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돌아가고 잇습니다)

 

    ----------    2편에서 계속

  • 차영배원주 2016.01.14 22:02
    힘들여 천착하지 않으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이 되겠네요.
    신학자는 물론 어떻한 신학적 담론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읽은후 그 시각이 독립적인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위험한 생각일까요? 근본주의자들의 축자영감설을 배격하는데 이 것도 위험?
    "과학으로 기독교 새로보기"의 저자 현우식(인지과학자?) 의 생각에 상당부분 공감하고 있는데요. (쥰님은 혹시 보신적이 있으신지...)
    바르트신학 공감하는 부분은 받아들이고 그 외는 버리렵니다. 저는 예정론 안믿습니다.
    열심히 읽고 분석 성찰해 모렵니다.
    쥰님 2편을 기대합니다.
  • 쥰(joon) 2016.01.15 03:05
    성서해석이 귀에걸면 기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 될 우려가 크죠
    한쪽 이야기만 듣는다면 더욱 편향될 수 밖에 없겠죠
    여러 해석을 접하고 자신의 시각을 가능한 객관적으로 유지 할려고 노력해야 겠죠 ^^
    과학으로기독교새로보기는 않읽어 봤네요
  • 오렌지 2016.01.15 22:10

    많이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요약해보면 바르트의 신관은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히 계시된 사랑=義의 하나님이고,
    신의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과 인간과의 완전한 사귐이었다는 것 인데요.

    그렇다면 바르트적 관점에서는 구약은 신의 불완전한 계시라고 볼 수 있을까요?
    사실, 성경에 표현된 신관은 성경 속 시대의 진행과 맞물려 변하고있지 않습니까? 바르트적 관점?에선 예수에 의해서 완전한 신의 계시가 이루어졌지만 예수를 몰랐던 불완전한 계시의 시대를 살았던 인류에게도 신에 의한 구원은 이루어졌을 것이라 생각이듭니다. 그렇다면 예수로 분명해진 계시의 알맹이가 이전의 불완전한 시대에도 (흩어진모습으로 or 불완전하지만 or 희미하게......) 인류에게 주어지지 않았을까요?
    바르트는 이런 지점을 사유했던 것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 쥰(joon) 2016.01.15 23:25

    구약시대라고 하면 율법 시대인데 바르트는 율법 역시 사랑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율법 역시 심판을 위한 의가 아니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라는 구체적인 사랑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구약 역시 율법(불완전 하지만)이라는 사랑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즉, 원래 사랑이신 하느님은 모든이를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것이죠

    바르트는 구약 시대에도 구원이 있다 없다를 명시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구약의 율법을 예수와 마찮가지로 사랑으로 본다는 것은 구약의 구원을 인정했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에 선조인데 당연히 구원받앗을 것이고 에녹과 엘리야는 살아서 하늘로 올라갔는데 당연히 구약에도 구원이 있기 때문에 특별히 이문제를 바르트가 거론하지 않은 것 아닐까요?
    한발 더 나가면 화해론에서 다시 이야기 하겠지만 바르트는 만인화해론을 주장합니다.

    만인구원론으로 오해 받기도 하지만 만인 구원론과는 차이가 있다고 바르트는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모든 사람과 화해 했다면 만인이 구원받는다는 것아닌가 라는 의문이 남씁니다.

    이에대해 바르트는 뭐라고 했을까요?   ^^

     

     

    정답은 아무말 하지 않았다 입니다  ^^  화해론을 다 집필하지 못하고 사망했으니 대답을 얻을 길이 없네요

  • 오렌지 2016.01.16 00:03
    '하나님은 모든 인간과 화해했지만 그 화해의 손을 잡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그러므로 만인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화해론도 사놓고 이런저런 생업의 핑게로 몇장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
    쥰님의 이어지는 글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쥰(joon) 2016.01.16 11:35
    화해론 시간되실때 슬슬 읽어보세요 ^^
    오렌지님이 궁금해 하시는 것에 바르트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화해론도 완성하지 못하고 생이 끝났네요
    저도 궁금하지만 ^^
  • 삼막골 2016.01.16 08:50
    교수님설명 읽어내려가면서..
    바르트의 주장.. 많이 공감됩니다
    바르트..바른사람일세^^
    칼벵보다 나으요 ㅋ
    다음편을 기다리며..
    막창드시러 인천 오세요.. 기다립니다
  • 쥰(joon) 2016.01.16 11:36
    저도 바르트 주장에 동감가는 부분도 있고 반대하는 부분도 있고 약간은 모순 되는 부분도 있지만 방향 자체는 건전하지 않을까 생각하네요 ^^
  • 초비(soon) 2016.01.23 19:55
    교수님.짱~~~
    그냥..상쾌합니다^^
  • 쥰(joon) 2016.01.24 07:33

    답답한 세상에 쪼금이라도 상쾌하셨다니 다행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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