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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양에 대한 구미정교수의 글을 하나 올려드립니다.

아래글에서 구미정 교수에 대해서는 물의 신학을 올려드리면서 소개해드렷죠?

생태신학을 하시는 분인데 재미로 읽어보시라고 올려드립니다.

 

 

참을 수 없는 진실의 버거움에 대하여  / 구 미 정


벌레 이야기

복음송 가사 중에 이런 게 있다. 벌레만도 못한 내가 용서받을 수 있나요? 지독한 자기비하다. 벌레만도 못하다니. 괜스레 징그럽고 흉측한 벌레, 수많은 다리를 버둥거리며 꿈틀꿈틀 배로 기어 다니는 벌레, 끈끈하고 누런 점액에 가끔씩 풍기는 역겨운 냄새까지……, 온갖 혐오감과 거부감을 불러일으켜 급기야 제거하고픈 욕망의 희생자가 되고 마는 벌레. 인간은 천하보다 귀하다면서, 과연 어떤 인생이기에 벌레만도 못한 인생이라 말하는가?


독일 문학가 프란츠 카프카는 착하고 성실하고 소심한 노동자 그레고르가 한 마리 벌레로 ‘변신’한 이야기를 발표하여 일약 20세기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떠올랐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침대에서 눈을 뜬다. 익숙한 풍경이다. 그런데 어딘가 달라져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철갑처럼 단단한 등껍질을 바닥에 댄 채 웅크리고 있는 나. 카프카는 벌레라는 은유를 써서, 기계 문명 속의 노동자에게 존엄한 인격이란 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되묻는다. 일하는 기계로서 도구적 기능을 다하고 있을 때는 사람대접을 좀 해주는 것 같다가도, 그러한 기능에 충실하지 못할 때는 가차 없이 벌레처럼 취급해 버리는 비정한 자본주의 체제를 향해 분노를 터뜨린다. 만약 그레고르가 그 날 아침에 그야말로 눈을 뜨지 않았던들, 다시 말해 스스로를 벌레로 자각하는 그러한 눈뜸의 경험이 있지 않았던들, 그는 적어도 인간인 ‘체’ 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눈을 뜨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벌레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무너진 상황을 자각한 실존에게 주어지는 천형과도 같은 정체인 셈이다.
벌레 이야기. <밀양>의 원작소설 제목이란다. 1985년에 나온 이 단편을 통해 이청준은 묻고 싶었단다.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어떻게 무너져 가는가를, 그리고 소위 “주체적 존엄성이 짓밟힐 때 한갓 벌레처럼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그 절대자 앞에 무엇을 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가”를.


소설에서 화자인 ‘나’의 ‘아내’는 초등학교 4학년짜리 아들 알암이를 유괴, 살해한 주산학원 원장 김도섭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아가지만, 이미 하나님께 자기 죄를 용서받았노라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평온한 얼굴을 보는 순간, 주체할 길 없는 배반감에 몸을 떤다. 두문불출 방 안에만 틀어박혀 벌레처럼 웅크린 채 속절없이 안으로 죽어가던 아내는 우연히 라디오를 통해 범인의 사형 집행 소식을 듣게 된다. 형장의 이슬로 스러져 가면서 범인이 남긴 마지막 말은 이랬다. “다만 한 가지 여망이 있다면 저로 하여 아직도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에 주님의 사랑과 구원이 함께 임해주셨으면 하는 기원뿐입니다. 저는 그분들의 희생과 고통을 통하여 오늘 새 생명을 얻어 가지만, 아이의 가족들은 아직도 무서운 슬픔과 고통 속에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아내는 자기를 신앙의 길로 인도한 김 집사에게는 물론 ‘나’에게조차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음독자살을 하고 만다.
이창동 감독은 광주 청문회가 한창이던 1988년, 문학계간지 『외국문학』에서 이 소설을 처음 접하고는 ‘이게 광주 이야기구나’ 싶었다고 한다.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누가 누구를 용서한단 말인가, 가해자의 참회란 얼마나 진실한 것이며 또 그 진실성은 누가 판단하는가, 소설이 던지는 질문이 가슴에 꽂혔다고 한다. 영화 <밀양>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만약 이창동이 이 소설을 일찌감치 영화했더라면, 영화 제목으로 밀양이 채택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소설에서처럼 주인공은 죽어야 하는 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밀양>에서 신애(전도연 역)는 죽지 않는다. 아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소설 속의 ‘나’는 냉정하게 아내와 객관적 거리를 유지한 채 관찰자로서 상황을 보도할 뿐이지만, 그 ‘나’의 대체 혹은 변신으로서 영화 속의 종찬(송강호 역)은 그러지 않는다. 속물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그저 허허대고 그림자처럼 신애 주변을 맴돌며 그의 고통에 연대한다. 그래서 소설에 비해 영화는 훨씬 덜 절망적이고, 훨씬 더 희망적이다. 거리에서든 동사무소에서든 교회에서든 거실 소파에서든 벌레처럼 몸을 웅크린 채 꺼이꺼이 속울음을 토해내던 주인공 신애는 결국 사람의 몰골로 되돌아온다. 삶은 그런 것이다. 마냥 그늘일 것 같다가도 한 줌 햇살에 잠시 쉬어 간다. 누구의 표현처럼 ‘신의 발길질’에 채여 이리저리 휘둘릴지라도 어떻게든 버티고 견뎌내다 보면 그런대로 또 꾸역꾸역 살아지게끔 되어 있다. 살아내면 살아진다. 삶은 그 자체로 위대한 역설이다.

밀양, 진실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영화가 시작되면 화면 가득 푸른 하늘이 펼쳐진다. 신애의 아들 준이가 차 안에서 바라보는 하늘이다. 무심한 흰 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는 하늘은 그 뒤로도 두어 번 더 등장하는데, 누구의 시점으로 바라보든 마냥 그대로다. 여여(如如)한 그 하늘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 5:45) 이 이해하기도 어렵고, 용납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화두를 복선으로 깐 채, 카메라는 하늘에서 땅으로 앵글을 이동한다.
길 위에 한 여자가 서 있다. 여자가 길로 나섰다는 것은 사연이 많다는 뜻이다. 집이 여성적 공간의 은유라면, 길은 그 반대가 아닌가? 집 안에 있는 여자는 남자(아버지 또는 남편)의 보호 아래 있지만, 길 위의 여자는 그런 보호 따위에 기댈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자에게 길은 불안한 미래와 예기치 못한 위험의 상징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첫 장면에서부터 신애는 고장 난 자동차 때문에 쩔쩔 매고 있다. 카센터에 도움을 청해 보지만,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정확히 어디쯤인지를 알 도리가 없으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비상 깜빡이를 켠 채 구조의 손길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갓길로 비켜 서 있는 자동차는 신애의 인생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신애는 서울을 떠나 밀양으로 가는 길이다. 그에게 서울은 잔인하고 비정한 도시로 기억될 터이다. 대부분의 ‘착한’ 여자들처럼 그도 자아실현의 꿈을 포기한 채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평범하게 사는 길을 선택했었다. 자식 낳고 도란도란 살림 하면서 살면 그게 곧 행복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 행복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한 것도 모자라 오입질까지 함으로써, 신애의 인격을 깡그리 부정하고 묵살해 버렸다. 신애 동생의 말을 조합하면, 남편의 교통사고는 그의 외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이쯤 되면 대부분의 ‘보통’ 여자들은 자존심에 중차대한 상처를 입음과 동시에 그야말로 꿈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기 마련이다. 에라, 이 나쁜 놈, 니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죽은 남편을 향해 실컷 쌍욕을 퍼붓고는 훌훌 털고 제 갈 길로 가면 된다. 그런데 신애는 그럴 내공이 없는 여자다. 진실을 대면할 용기가 없다. 그의 ‘비보통적’ 특징은 그가 지나치게 여리고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는 진실을 왜곡해가며 착한 여자 연기에 몰두한다. 남편은 한 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다, 죽는 순간에도 나와 준이만을 사랑했다, 그러니 나는 남편의 평소 소원대로 남편 고향에 내려가 남편의 피붙이를 키우면서 조용히 살리라, 그렇게 소설을 쓰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진실의 무게가 버거웠던 게다. 그러니까 그의 밀양행은 상처받기 쉬운, 이미 치명적인 외상을 입어 갈기갈기 찢긴 자기 내면을 보호하려는 방어본능의 발로인 셈이다. 땅을 살 만한 여윳돈이 있는 것처럼 짐짓 허세를 부린 그의 과장된 제스처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트럭운전사의 도움으로 카센터 사장 종찬이 도착한다. 견인차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 신애가 묻는다. 밀양이 어떤 곳이냐고. 뭐 사람 사는 데가 다를 게 있겠습니까, 경기는 엉망이고, 한나라당 도시고, 말씨는 부산 말씨고……. 똑같은 질문이 영화 말미에 가면 신애 동생의 입으로 한 번 더 물어진다. 밀양이 어떤 곳이냐고. 누나를 처음 만났을 때도 똑같이 묻더라며 너털웃음을 짓던 종찬이 대답한다. 사람 사는 데가 다 똑같지예.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애써 거짓 자아를 만들고 그 속에 움츠러든 신애에게 종찬은 현실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같은 존재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다. 어디서 사는지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아니 ‘어떻게’까지 갈 것도 없이, 삶의 이유니 의미니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무조건 살아내야 할 때도 있다. ‘밀양’의 뜻을 묻는 신애에게 사람이 어디 뜻보고 사냐고, 그냥 사는 거라고 말하는 종찬의 단순함은 그 자체가 진리다. 밀양이라고 해서 서울보다 나을 것이라는 전망은 애당초 접는 게 좋다. 게다가 밀양은 전형적인 ‘한나라당 도시’라는 거 아닌가? 순진한 시골이라고 착각하거나 낭만화해선 안 된다. ‘한나라당’이라는 기호를 빌어 감독은 보수적이며 배타적인 그곳 정서를 슬며시 고발한다.
사실 영화가 전개되면서 하나둘씩 드러나는 밀양 사람들의 면모는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인간적이다. 피아노 학원을 차린 신애가 개업 떡을 돌리기 위해 들어간 옷가게 주인은, 인테리어를 바꿔 보라는 그의 호의적인 제안이 못내 못마땅하다. 나중에 신애가 미장원에서 파마를 하다 들으니, 그 주인은 서울에서 갓 내려온 여자가 오지랖 넓게 잘난 척 하더라며 흉을 보고 있다. 일그러지는 신애의 얼굴, 그런 신애와 눈이 마주치자 무안해하며 얼른 표정 관리를 하는 옷가게 여자, 그러고 사는 거다. 그게 징그러운 우리네 사람살이다.
 

신애에게 밀양은 삶의 진실로부터 더 이상 도망칠래야 도망칠 데가 없는 최후 격전지나 다름없다. 아픈 과거와 단절한 채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려 내려온 밀양에서 그는 다시금 칠흑 같은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아들 준이 유괴되어 살해당한 것이다. 범인은 준이 다니던 웅변학원 원장 정도섭. 만약에 이 영화가 단순히 아동 유괴 사건에 관한 영화라면 이 대목에서 끝나는 게 정석이겠다. <그 놈 목소리>처럼. 허나 감독은 욕심스럽게도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아주 진지한 이야기를 풀어갈 참이다. 평범한 한 여자에게 왜 이토록 참혹한 고통이 연달아 들이닥치는가,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도대체 이런 삶을 지탱해주는 구원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만약에 신이 존재한다면 그가 이 모든 악을 허락하기라도 한 것일까, 신의 사랑과 용서는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골고루 미치는가, 아니면 차별적인가 등등, 말하자면 철학적이고도 종교적인 문제, 그 중에서도 특히 신정론(神正論)이라고 알려진 주제를 건드려볼 요량이다.

‘그런’ 구원은 없다

영화 <매트릭스>(Matrix)에 보면 주인공 네오가 진실에 눈을 뜨는 과정이 흥미롭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두 가지 알약을 내밀며 말한다. 파란 약을 먹으면 어제와 다름없이 내일도 평온한 삶이 보장될 것이다. 조작된 기억이 가짜인 줄도 모른 채로 살 테니까. 반면에 빨간 약을 먹으면 적나라한 ‘진실의 사막’으로 내동댕이쳐질 것이다. 그러니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네오는 용감하게도 빨간 약을 집어삼키지만, 신애는 그러지 못한다. 경찰서에서 아들의 살인범과 잠시 눈이 마주쳤을 때, 회피하는 쪽은 오히려 신애다. 아들을 화장하는 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고, 서방 잡아먹은 년이 기어코 자식까지 앞세워 보냈다고, 악다구니를 퍼붓는 시어머니 앞에서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하는 그다. 쨍쨍해서 더 야속한 햇살 아래 털썩 주저앉아 신애는 종찬에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내가 왜 피했을까요? 생각 같아서는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범인인데 왜 고개를 돌렸을까요?
 

소파에 웅크리고 누운 채로, 아빠가 보고 싶을 때마다 아들이 그랬듯이, 남편의 코 고는 소리를 흉내 내며 소리 없이 눈물 흘리는 신애는 영락없이 한 마리 벌레다. 그도 자기가 여전히 과거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상처 입는 게 두려운 그의 거짓 자아는 조작된 과거 속으로 도피하는 타성에 젖은 지 오래다. 다짐하듯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 아들의 사망신고서를 작성하러 동사무소에 가보지만, 아직 그는 현실을 직시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 애꿎은 직원한테 폭발하듯 화를 내는 장면에서 그의 내면에 축적된 분노의 크기를 능히 짐작하게 된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동사무소 밖으로 나온 그는 ‘상처 입은 영혼을 위한 기도회’라는 글귀에 맹목적으로 이끌린다. 약국 김집사가 당신같이 불행한 사람은 꼭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진심으로 간곡하게 말을 건넸을 때도, 전혀 불행하지 않다며 위장전술을 썼었다. 그랬던 그가 문득 종교에 귀의하는 과정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으나 동시에 위험성이 내포된 일종의 심리 게임인 것처럼 보인다.
 

믿음이란 것이 그렇게 ‘값싼 은총’이라면, 온갖 예배와 기도회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힘차게 찬송을 부르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주기도문을 외우고 열심히 성경책을 들여다보고, 그러는 것만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이제 평안을 얻었노라고, 하나님과 새롭게 연애하는 기분이라고 수줍게 웃는 신애의 미소에 우리도 안도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구원은 없기에 그를 보는 우리의 마음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신애는 아직도 빨간 약을 먹지 않은 것이다. 다만 종교적 위로라는 파란 약에 심취해 잠시 황홀경에 빠져 있을 뿐.
신애가 교회에서 파는 사이비 프로작(항우울증 치료제)의 효능에 의심을 품고 마침내 빨간 약을 먹게 되는 시점은 교도소에서 정도섭을 면회한 이후이다. 용서하라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대로 범인을 용서해주러 교도소를 찾아간 신애는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노라고 편안한(뻔뻔한?) 얼굴로 담담하게(당당하게?) 말하는 그를 보고 경악한다. 아니, 그가 아니다. 정작 미운 대상은 하나님이다. 내가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하신단 말인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극도의 배반감에 허탈해진 신애는 점차 위악적으로 변해간다.
 

미친 것처럼 행동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내내 그가 가장 정상적으로 보인 때가 바로 그 때가 아닌가 싶다. 신애는 더 이상 고통을 내면화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외면화한다. 일부러 보란 듯이 거칠게 저항하고 분노하고 도전하고 공격한다. 이런 행위는 외면하고 거부하고 회피하고 왜곡하는 데 익숙했던 그가 ‘진실의 사막’으로 나서는 몸짓이다. 죽은 남편은 아내에게 성실하지도, 아내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담배 피면서 숟가락으로 머리 때리는 …… 무식한 색골”이란다. 신애는 시종일관 지속적인 종찬의 호의가 단순한 시골 인심의 표현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도 이미 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 그저 속만 태우고 있지, 늘 속삭이면서도 사랑한다는 그 말을 못해……” 종찬 앞에서 실실 대며 나미의 <빙글빙글>을 부르는 신애는 그 어느 때보다 명료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있다. 다만 이 낯선 진실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것이 미치도록 궁금할 뿐이다. 신애는 하나님 앞에서 최후의 발악 혹은 투정이라도 부리는 양 자살을 시도한다. 그야말로 ‘시도’인 것이, 대부분의 자살이 그렇듯, 신애도 정말 죽을 의도는 없기 때문이다. 살고 싶다는, 살려달라는 반어적 어법이 자살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그대여

그래서 신애는 답을 얻었을까? 모르겠다. 종찬이 선물한 새 옷으로 단장하고 꽃다발까지 든 채 정신병원에서 나왔지만, 종찬의 들뜬 표정과는 반대로 신애의 표정은 덤덤하기만 하다. 머리를 자르고 싶다는 신애를 데리고 종찬이 찾아간 미용실은 우연히도 살인자 정도섭의 딸이 취직해 있는 곳. 그곳에서 신애는 운명의 장난처럼 정아에게 머리를 맡기게 된다. 미용기술은 언제 배웠어? 소년원에서요. 거긴 왜 들어갔어? 나쁜 애들하고 사고 좀 쳤거든요. 서먹하게 오고가는 대화에 애증이 묻어있다. 이윽고 정아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고, 신애는 눈을 감는다. 아이한테 무슨 잘못이 있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애써 보지만,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정아의 가위질이 계속되면서 뒤늦게 정아가 어색한 인사를 건네자, 신애는 또다시 폭발해 버린다. 미용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왜 하필이면 나를 여기로 데려왔냐고, 득달같이 화를 내며 밖으로 나가버린다. 외면상 종찬에게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화를 내는 것이다. 잊고 살만 했는데 왜 자꾸 성가시게 구냐고, 평생 이렇게 따라다니면서 자꾸만 상기시킬 거냐고. 그는 안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는 것을.
 

반 틈 잘려나간 머리 그대로 옷가게 앞을 지나는 신애를 주인아줌마가 불러 세운다. 일전에 말한 대로 인테리어를 바꿨더니 매상이 올랐다며 호들갑이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근데 미친년처럼 머리는 왜 반만 잘랐어? ‘미친년’이란 말에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배를 잡고 웃는다. 진실은 왜곡한다고 해서 덮어지지 않는 법이다. 마치 손바닥으로 햇빛을 가린다고 해서 해가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이 장면은 신애가 그들의 일부로 완전히 받아들여졌음을, 그리고 앞의 장면과 연결 지어 자신에게도 남겨진 인생의 숙제가 있음을 암시하는 주요 장면이다.
신애는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꺼내들고 마당에 자리를 잡는다. 혼자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마저 자를 참이다. 라깡 류의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른바 거울 단계에 이르러 인간이 최초로 자아를 총체적으로 인식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거울 앞에 앉은 신애는 그 자체로 희망적이지 않은가? 확실히 그는 견뎌냈고, 앞으로도 이를 악물고 버텨낼 것이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삶의 그늘을 가볍게 털어낼 줄도 알고, 고통에 성숙하게 대처하는 법도 익힐 것이다. 정답을 모르면 어때, 중요한 건 어쨌든 삶이 지속된다는 것이고, 여기 이 땅에서 모두가 지지고 볶으며 부대껴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 때 어김없이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종찬. 거울을 들어주는 것쯤은 괜찮겠지예, 넉살 좋게 웃으며 거울을 들고 선다. 거울 속의 신애가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있다. 상처는 어차피 제 스스로 핥아야 낫는다. 누가 대신 낫게 해 줄 수 없다. 혈루병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기 위해 숱한 난관을 넘어서야 했듯이, 그리하여 예수로부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선언을 받아냈듯이, 저마다 홀로 감당해야 할 제 몫의 구원이 있다. 치유는, 해방은, 부활은 그런 자에게 주어지는 값비싼 은총이다.
 

경쾌한 음악과 함께 카메라가 옆으로 빠지면서, 땅바닥을, 그것도 다 쓴 세제 통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는 진흙탕을, 그늘과 햇살이 뒤섞여 흔들거리는 묘한 실루엣으로 잡아낸다. 하늘은 한결같이 빛나지만, 땅의 현실은 그렇지 않고, 또 그럴 수도 없다는 압축적인 깨달음이 전해지는 순간이다. 그런 땅의 현실을 망각한 채 단번에 하늘로 우리를 들어 올리는 황홀한 초월이란 잘 나가는 종교 상품일 뿐, 진리는 아니다. 현실이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로 우리를 짓누른다고 해서 항복하듯 신앙에 귀의한다면, 그런 신앙은 우리를 노예화할 뿐, 결코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줄 수 없다.
그렇다면 신애를 대신하여 끝으로 다시 묻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선하고 의로운 자가 아무 이유 없이 고통당할 때 그분은 과연 어디서 무얼 하시는가? 모든 게 하나님 뜻이라고 섣불리 말하지 말라.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고통을 주신다는 이상한 신학을 유포하지도 말라. 고통과 사랑을 잘못 연결했다가는 자칫 하나님을 사디스트(sadist)로 만들 수 있다. ‘왜’ 고통이 생기는가는 욥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아닌가? 의인은 망할 리 없고 악인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인과응보적 신앙은 욥의 친구들의 것이지, 욥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 죄가 없는데 왜 고난이 닥치는가 따져 물을수록 하나님의 선하심에 금이 가는 걸 깨닫고는 욥도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욥은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는가?”(욥 2:9)라던 최초의 믿음을 회복한다. 모르는 것은 그냥 모른 채로 넘어가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 그것이 욥이 찾은 궁색하지만 지혜로운 답이었다.
한편, 욥의 세 친구는 입만 열면 욥에게 회개니 용서니 떠들어대며 인습적인 교리를 가르치려 들다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자아낸다. 하나님은 그 세 친구에게 말씀하시길, 너희가 말로 잘못을 범했으므로 욥에게 재물을 가지고 가서 욥이 용서를 비는 번제를 드리게 하라고, 욥이 너희를 용서해 달라고 빌어야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주겠다고 하신다.(욥 42:7-8)
 

이 대목을 염두에 둘 때, 신애의 배반감은 충분히 이해할만한 것이다. 욥의 경우에는 그토록 자상하게 배려해주신 하나님이 왜 자기에게서는 용서의 기회를 박탈해 갔느냐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애가 ‘왜’에 집착하기 보다는 때가 되면 저절로 풀릴 비밀이라 여긴 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욕심을 내본다. 자기에게 고통을 주신 이로서가 아니라 자기와 더불어 고통당하는 분으로서 하나님을 경험하면, 고통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만약 이 경지까지 그의 신앙이 깊어진다면, 그는 살인범의 딸이라는 이유로 평생 굴절된 삶을 살아야 하는 정아의 고통까지 들여다볼 힘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도 철저히 신애의 몫일 뿐, 우리가 그에게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감독이 영화에서 기독교인들을 향해 은근히 야단치는 대목도 그 부분이 아닌가? 너무 쉽게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밀양>에서 감독은 어쩌면 종찬이라는 인물을 통해 고난당하는 이웃을 향한 가장 ‘기독교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종찬은 신애의 피아노 학원에 국적 불명의 상장을 걸어놓을 만큼, 세상살이에 도가 튼 속물처럼 보인다. 그의 속물근성은 커피 심부름을 온 다방 아가씨를 아무렇지 않게 희롱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하지만 좋아하는 여자 때문에 교회에 나가고, 그 여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 거리 찬양을 하는 등, ‘불순한’ 사이비 신앙의 전형인 그가 밉기는커녕, 오히려 정겹게 느껴진다. 신앙의 확신으로 중무장한 기독교인보다도 맹숭맹숭 잘 모르겠다고 너스레를 떠는 종찬의 말이 훨씬 더 진실해 보인다. 그는 신애에게 질퍽한 현실 속의 ‘비밀스런 햇빛’ 같은 존재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적인 인물인 것이다. 종찬은 신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설령 설명한들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가가려 할 때마다 번번이 거절당하고 벽에 부딪히지만, 그렇다고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그저 곁에 있어주되, 요구하거나 관여하기보다는 눈치껏 빈자리를 메워주는 방식이다. 이런 고마운 햇볕이 어디에 있는가? 삶에서 잠시나마 이렇게 따사로운 햇볕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우리네 삶은 충분히 아름답지 않은가?
 

서른 셋, 의미심장한 나이의 신애는 결국 밀양에서 그야말로 ‘밀양’ 같은 남자 종찬 덕분에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하기야 노총각 종찬의 삶에도 신애 덕분에 쨍하고 볕들 날이 찾아오겠지. 그렇게 서로에게 ‘밀양’이 되어주라고, 영화는 우리를 유혹한다.

 <기독교사상>, 2007. 7월호 특집.

 

 

 

밀양뿐만 아니라 여러 영화를 보면서 기독교를 생각해봅니다.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에서 교도소를 나온 금자에서 목사가 두부를 건네면서 죄를 짓지말라고하자 금자는 목사에게

 

' 너나 잘 하세요~~~'

 

200508191636571.jpg

 

  • 차영배원주 2016.08.11 16:13
    밀양은 보지 못했는데. 제가 외화 SF등을 선호하는 편이라서, 요즘 한국영화도 명품 많지요.
    친절한 금자씨는 봤는데. "너나 잘 하세요!"는 명품 대사. 그때 통쾌했음...ㅎㅎ
  • 쥰(joon) 2016.08.12 00:10
    밀양 기회되시면 한번 보셔도 괜찮은 영화입니다. ^^
  • sozo 2016.08.12 23:03

    악!
    잘나가다가
    마지막에 그게 뭐야아!

    실컷 잘난체 하고선
    '때가 되면 저절로 풀릴 비밀이라 여긴 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했다면 어땠을까'라니
    그러면 앞에서
    '모든 게 하나님 뜻이라고 섣불리 말하지 말라'라고 한 말은 도대체 뭐야?

    게다가 종찬이가 눈치껏 빈자리 메꿔주는 행동때문에 그를 그리스도적인 인물이라니
    이근안도 서세원도 조용기도 이동현도 또 뭣도 뭣도 뭣도
    누군가의 빈자리를 메꾸어 주었으니 죄다 그리스도적인 인물이것다

    (마지막 두 문단 때문에 앞의 그 화려한 분석이 망해버렸다)

  • 쥰(joon) 2016.08.13 12:34

    ㅋㅋ 목사라는 한계아닐까요? ^^
    저 같으면 최소한 그런 예수는 없다라거나 아예 성서에 나오는 그런 신은 없다로 갈텐데요

  • sozo 2016.08.14 13:19
    그래도 나름 맛깔난 음식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밀양 다시 보려구요^^
  • 쥰(joon) 2016.08.16 02:38
    밀양 혹시 다시 보시면 소감하나 부탁드립니다 ^^
  • 삼막골 2016.08.24 10:58
    구미정교수님..
    CBS성서학당이란 프로그램에서 처음 알았어요..
    재밋게 웃으면서 강의 잘하는모습 기억합니다^^
    별표 3개★★★
  • 쥰(joon) 2016.08.25 02:55
    구미정 교수 여장부져 근데 마음은 여리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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