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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번 시간과 마찮가지로 회색 검은색 어록중 대표적인 것 한두개를 소개해 드리고 마지막 시간에 총정리 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개인적인 사고(?? ^^)때문에 조금씩 늦어지는 것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성서 구절은 전편과 마찮가지로 예수세미나의 해석을 따릅니다

 

 

◎ 예수 어록 아닌 것 같은데!!! - 회색 어록

 

회색어록은 위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예수어록은 아닌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예수의 생각을 일부 담고 잇다고 보여지는 어록입니다.

 

첫째인 많은 사람들은 마지막이 되고, 마지막이 된 많은 사람들은 첫째가 된다.

(막 10,31; 마 19,30)

마지막은 첫째가 되고, 첫째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

(마 20,16)

첫째가 될 사람들은 마지막이 되고, 마지막이 될 사람들은 첫째가 될 것을 기억 하라.

(눅 13,30)

많은 첫째들이 마지막이 된다. 그리고 혼자가 될 것이다.

(도마 4,2)

 

이 문구는 4복음서에는 병행구조를 가지고 잇습니다

즉, 첫째---, 마지막---. 라는 병행구조를 가집니다

마태복음 20장 16절에서 ‘마지막이 첫째가 되고, 첫째가 마지막이 되는 것’은 예외없는 법칙으로 묘사하고 잇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9장 30절과 마가복음에 서는 ‘많은’이라는 형용사를 삽입하여 절대적인 법칙이 아닌 거의 대부분의 법칙으로 의미를 반감시킵니다,

도마복음에서는 병행구조가 아닌 쳇째가 마지막 그리고 혼자가 된다고 기록하고 잇습니다.

즉, 어록의 해석변화가 일어난 것을 알수 잇습니다.

 

복음서마다 이번 어록의 위치도 다르게 나타나고 잇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에게는 재물과 영생이 올것’이라는 29, 30절 어록 뒤에 위치하고 잇습니다.

마가복음 저자에게 있어서 적어도 희생당한 사람들 즉, ‘마지막인 자들’은 첫째가 되어 희생의 대가를 백배나 돌려 받을 것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반면 예수에게 있어서 정의를 행한 만큼의 동일한 보상을 열망하는 자들, 적어도 당연히 보상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보상을 얻지 못할 것을 이야기하고 잇습니다.

 

이같이 인간의 보통 법칙을 뛰어넘는 혁명적 요소는 예수의 어록 또는 비유의 특징입니다.

예를 들면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마 20,1-15)에서도 인간의 일상적인 법칙을 혁명적으로 파괴시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첫째와 마지막’ 어록이 2번 나옵니다.

처음 마태복음 19장 30절은 마가복음과 같은 상황에서 이 어록을 기록하고 잇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0장 16절은 하느님 나라를 비유한 포도원 노동자들의 비유 바로 뒤에 위치시켜 의미를 다르게 만듭니다.

포도원 노동자의 비유는 ‘첫째와 마지막’에 관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일상적인)기대법칙에 대한 파괴’라는데 관점을 두고 잇습ㅁ니다.

 

누가복음에 나온 말씀은 마가복음과 마태복음과는 달리 특정한 상황없이 독립적인 어록으로 기록하고 잇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6절 ‘첫째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The first will be last / οἵ πρώτοι ἔσχατοι)는 절대적인 표현으로 예외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잇습니다.

 

누가복음의 말씀은 마가복음의 ‘마지막이된 많은 사람들’(many of the last/ πολλοὶ δὲ εσονται ἔσχατοι)이라는 어록과 표현이 거의 비슷하다 는 것을 알 수 잇습니다

 

예수 세미나의 학자들은 이 어록들 중 예수의 어록으로 가장 근접한 기록을 마태복음 20장 16절로 보고 잇습니다.

이 어록은 마지막이 첫째가 되고 첫째가 마지막이 된다는, 기존질서의 역전, 가치의 반전을 의미하며 사회적 경제적 평등을 지향한다고 해석합니다.

 

예수의 일반적인 어록 형태가 절대적, 비타협 선언을 선호하고 잇어 절대적인 표현이 원래 형태였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마가복음, 누가복음, 도마복음, 마태복음 19장 30절은 회색의 판정하고 잇습니다.

 

 

◎ 에이 이건 예수와 전혀 상관없는 어록인데!!! - 검은색 어록

 

19 그리고 예수는 그들에게 말했다: ‘신랑의 친구들은 신랑이 왔을 때에 금식하지 못할 것이다. 신랑이 있는 한 그들에게 금식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그날이 오면 그들은 금식할 것이다.”

(막 2,19-20)

 

15 그리고 예수는 그들에게 말했다 ‘신랑의 친구들은 신랑이 있는 한 애도하지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그날이 오면 그들은 금식할 것이다’

(마 9,15)

 

34 그리고 예수는 그들에게 말했다 “신랑의 친구들은 신랑이 있는 한 금식을 하게 하지 말아라.

35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그날이 오면 그때에 그들은 금식할 것이다

(눅 5,34-35)

 

1 그들은 예수에게 말했다. 오늘 와서 우리와 함께 기도하고 금식하자.

2 예수가 말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 또는 내가 어떤 것을 하지 않음이 있는가?

3 신랑이 신부 방에서 나올 때에, 사람들은 금식하거나 기도할 것이다.”(도마 104,1-3)

 

이 어록은 금식에 대한 부정과 긍정의 두어록으로 구성되어 잇습니다.

금식에 대한 부정의 어록은 예수가 실제 햇을 가능성이 잇다고 보지만 신랑을 빼앗기면 금식을 할것이라는 구절은 예수 사후 초대 기독교의 산물로 해석되어 집니다.

 

금식과 결혼식은 반대되는 것입니다.

예수 세미나는 금식에 대한 부정의 말씀이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였지만 예수와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어록의 형태는 예수의 어록이거나 예수의 어록일수도 잇다고 보지만 신랑을 뺏기면 금식할 것이라는 어록은 초대 기독교가 금식했던 관행을 정당화하기 위해 덧붙여 졋다고 봅니다.

 

예수 사후 유대교 예수파(황목사님은 인정 하지 않으시겟지만)구성원들은 예수는 ‘떠나는 신랑’으로 이해되고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예수의 죽음은 신방을 떠난 것과 같은 의미로 보앗던 것입니다.

그들은 금식하고 애도해야 했고 복음서 저자는 금식에 대한 예수의 부정적 어록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은 것으로 해석합니다.

 

도마복음의 구조를 보면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수에게 금식할 것을 요구하지만 2절에서 예수는 그가 금식하고 기도해야 할만한 죄를 졋는지 되묻고 잇습니다.

반면 3절은 마가복음 2장 19-20절과 거의 일치하는 어록을 기록하고 잇습니다.

도마복음 저자는 마가복음의 기록을 알고 잇었으나, 이 어록을 다른 상황으로 만들엇다는 것을 알수 잇습니다.

신랑을 뺏기면 금식하것이라는 어록은 검은 어록으로 예수세미나는 보고 잇습니다

 

 

 

- 예수의 행적은 어떻게 볼것인가? -

 

예수세미나에서는 6년이 넘는 연구를 통해 어록뿐만 아니라 행적에 대해서도 여러 분석을 하고 세미나를 진행하여 결과물을 내놓고 잇습ㅁ니다

 

 

◎ 행적1

 

15 그리고 나서 예수는 많은 세금 징수원들과 죄인들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과 함께 레위 집의 식탁에 앉았다. (기억하라 거기엔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그를 따랐다) 16 그리고 바리새 학자들이 그가 죄인과 세금 징수원 들과 식사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그들은 그의 제자들에게 물었다. “그가 어떻게 세금징수원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가?” 17 예수가 우연히 듣다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건강한 사람은 언제 의사가 필요한가? 그것은 그가 아플 때다. 나는 종교적인 사람의 편에 서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 왔다!”

(막 2,15-17)

 

10 예수가 (마태)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있는데, 바로 그때에 거기에는 많은 세 관 징수원들과 죄인들이 모여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다. 11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볼 때마다 그들은 그의 제자들에 게 물었다. “왜 당신의 선생은 세금 징수원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가?” 12 예수가 우연히 듣고 말하였다. “건강한 사람은 언제 의사가 필요한가? 아플 때 이다. 13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가서 배워라. 나는 희생대신에 자비를 바란다. 결 국 나는 종교적인 사람의 편에 서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 왔다!”

(마 9,10-13)

 

29 레위는 예수에게 그의 집에서 큰 연회를 베풀었다. 그곳에는 큰 그룹의 세금 징수원들과 다른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다. 30 바리새파와 그들의 학 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불평하였다. 왜 너희 사람들은 세금 징수원들과 죄인 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이에 예수가 대답하기를: 건강한 사람이 의사가 필요한 때는 아플 때이다. 나는 종교적인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려고 온 것이 아 니라 죄인들을 위해 왔다.

(눅 5,29-31)

 

예수세미나는 예수의 진정한 행적 중 하나로 식사 나눔를 이야기합니다.

이번 행적에는 예수를 제외한 세가지 인물이 등장합니다.

세금 징수원, 죄인 그리고 바리새인이 등장합니다.

학자들은 이 장면이 허구라고 보고 잇습니다.

예수가 하층민과 식사를 나누는 것은 사실로 보여지고 바리세인들이 비난한 것도 사실로 보이지만 바리세인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고 이 질문을 예수가 맞받아치는 장면은 후대에 여러 전승을 병용해서 기록하느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와 하층민의 식사전승, 바리세인들의 비난 전승 두가지를 항장면에 같이 엮에서 스토릴ㄹ 만드는 형태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기록방식은 고대 중근동의 스토리 구성에서 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행적은 어떤 역사적 배경을 포함하고 잇을 까요?

예수세미나의 학자들은 이 행적에서 3가지를 추정해 냅니다.

 

첫째 예수는 사회적 약자들과 개방적으로 교제하였다.

둘째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비난받던 죄인들과의 교제로 예수는 기존 기득권층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셋재 예수는 비유와 경구를 통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는 것입니다.

 

예수세미나의 연구 결과는 이 장면 자체는 허위이지만 하층민과의 식탁나눔과 기득권층의 비난은 사실로 역사적 예수를 파악하는데 가치가 충분하다고 보고 진정성이 잇는 스토리로 인정하고잇습니다.

 

제가 수차례 강조햇던 것 기억하실지 모르겟지만 식사의 나눔은 예수의 정신을 극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모임(예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예식은 설교가 아니고 식사의 나눔엿습니다.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식탁 교제가 예수의 가장 특징적인 활동으로 식사를 나누는 것은 서로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가 행한 개방된 식탁 나눔은 사회적, 정치적 투쟁을 의미하며 당시 유대 정결제도에 익숙한 교조주의자들에게 예수의 식탁 나눔은 형식적 정결제도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새로운 사회 규칙(하느님 나라로 표현되는)보여주는 것입니다.

차별도 철폐하고 공존하는 인민공동체, 하느님의 나라 즉, 경제적 사회적 평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또 옆으로 가려고 하네요 시간도 없는데 ㅠㅠ)

예수세미나에서는 이 행적을 하층민과의 식사나눔은 예수의 행적으로 보지만 바리세인과의 논쟁은 만들어진 전승(허위, 문학적인 구성)으로 판단합니다.

 

 

◎ 행적2

 

24 그리고 큰 무리가 예수를 따라갔고 그를 밀었다. 25 거기에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녀는 많은 의사에게 가보고 그녀가 할 수 있 는 온갖 것을 했지만 결국 낫지 않았고 상태는 악화되었다. 27 그 여자가 예수에 대해 듣고서, 그녀는 무리 속에서 예수를 따르다가 그의 옷자락을 만졌다. 28 그 녀는 “만약 내가 그의 옷을 만지면 나는 치유될 것이다”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29 그러자 곧 출혈이 멈추었고 그녀는 자신의 병이 치유되었다 는 것을 알았다. 30 그런데 갑자기 예수는 자신의 힘이 빠져나간 줄을 알고 뒤를 돌아보며 군중에게 물었다.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31 제자들이 그에 게 “무리가 당신을 에워싸고 밀고있는데 누가 당신을 만집니까?”하고 말했다.

32 예수는 이 일을 한 사람을 알아보려고 둘러보았다. 33 비록 여자는 무섭고 떨렸지만 그녀가 한 일을 알기 때문에 예수 앞에 나와 엎드려 사실을 이야기 했다. 34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딸아 너의 믿음이 너를 치유했다. 평안히 가 서 너의 몸을 돌보거라.”

(막 5,24b-34)

 

20 그때에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는 여자가 예수를 따라와서 그의 옷자락 끝을 만졌다. 21 그녀는“내가 만약 그의 옷자락이라도 만진다면 나는 치유될 것이 다”라고 그녀 자신에게 말했다. 22 예수가 뒤를 돌아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

“용기를 가져라. 딸아, 너의 믿음이 너를 치유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서 바 로 치유되었다.

(마 9,20-22)

 

42 예수가 걸어갈 때 무리가 그 주변에 모여 다녔다. 43 12년 동안 누구도 치 료하지 못했던 혈루병을 앓는 여자가 44 예수의 뒤를 따라와서 그의 옷자락 끝 을 만졌다. 즉시로 그녀의 피 흘림이 멈췄다. 45 그리고 예수는 “누가 나를 만졌 는가”라고 말했다. 모두가 이를 부인하자 베드로는 “무리가 당신을 에워싸고 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46 그러나 예수는 “누가 나를 만졌고, 나의 능력이 빠져나갔다”라고 말했다. 47 그리고 한 여자가 자신이 빠져나갈 수 없음을 알 고 떨면서 앞으로 나와서 엎드렸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녀는 왜 예수를 만 졌고 어떻게 그녀가 즉시로 치유되었는지 설명했다. 48 예수가 그녀에게 말했 다. “딸아, 너의 믿음이 너를 치유했다. 가서 평안하여라.”

(눅 8,42b-48)

 

혈루병을 앓는 여인의 이야기는 마가복음 5장에 나옵니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혈루병 여인의 이야기를 야이로의 딸을 치유하러 가는 길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잇으며 이것은 저자의 의도된 편집으로 보여집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마가복음에 의존하여(보고 베꼇다고 하기는 좀 그렇고 ^^)혈루병 여인 이야기를 기록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는 간략하게 기록하고 잇습니다.(예수의 힘이 빠져나갔다는 부분과 ‘누가 예수를 만졌냐’고 묻는 장면이 생략되엇고 따라서 여인이 자신의 행위를 고백하는 장면도 빠져잇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예수가 무리에 떠밀려갔다’는 장면은 예수의 능력이 나간것을 극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문학적인 도입구입니다(당연 검은색 ^^)

12년 동안 혈우병을 앓았다는 것은 앞의 야이로의 딸 이야기에서 딸이 12살인 것과 문학적으로 대비시키기 위한 문구입니다.

(당시 중근동에서는 12라는 숫자가 완전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잇기 때문에 12년간 혈우병에 시달렷다는 것은 완전히 혈우병에 사로잡혓다는 의미로 보기도 합니다)

 

즉, 마가복음 5장 25-27절은 마가복음 저자가 지어낸 문학적인 장치입니다.

 

28절에 ‘예수 옷에 손을 대면 치유될 것이다’고 독백하는 여인의 마음은 마가복음 저자의 설명으로 혈우병 여인만 알수 잇는 것으로 이러한 문학적인 표현을 전지적 작가시점이라고 합니다.(전지적 작가시점의 소설은 작가가 모든 것을 알고 잇다는 전제로 쓰여지는 소설로 등장인물의 마음이야 자기만 아는것이죠)

 

여기에서 병은 육체적인 병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질병도 의미합니다.

혈루증은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병으로 여자가 혈우병에 걸릴 경우 유대인의 율법에 따라 부정한자(죄인)로 낙인찍힐 뿐만 아니라 레위기 율법에 따르면 월경 중인 여인은 매우 부정하여 그녀가 누운 자리와 그녀를 만진 사람도 부정이 전해진다고 하여 그녀는 병에서 오는 아픔과 고통이외에 사회적 소외와 박탈감을 겪게됩니다.

당연히 성생활도 금지되고 아기를 생산할 수도 없게됩니다.

즉, 여자(인간)으로서의 모든 권리가 박탈되며 종교적인 행사에서도 제외됩니다.

정교일치 사회인 유대에서 종교적인 행사 참여 금지는 사형이나 마찮가지의 형벌입니다.

즉, 혈우병 여인은 혈우병의 고통보다 그에 따른 사회적인 고통이 더크게됩니다.

성서의 치유 기적에서 질병의 치료와 사회적 고통의 치유를 구분해서 봐야 합니다.

예수의 치료는 육체적인 기적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고통으로 부터의 해방에 더 중요성을 가집니다

1세기 중근동은 질병과 죄를 결합시켜 인식하엿고 과중한 세금과 가난으로 하층민들은 육체적 질병이 일어나거나 장애자가 될 경우 종교, 정치지배층은 병자들을 비난하고, 병자 자신의 죄로 인해 질병에 걸렸다며 모든 접촉을 금지시키고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버렷습니다.

예수가 병자들을 접촉하는 행위는 부정한 행위이지만 부정한 접촉을 통해 병자가 죄가 용서되엇다 그리고 죄가 없다는 사회적 저항적 선포인 것입 니다.

 

예수의 기적(이적)은 병고쳐준다 안수 장풍 받아라 또는 병 물러가라 어히어히하는 무당질을 한 것이 아니고 질병이 죄 또는 저주라는 잘못된 종교적 인식으로 사회로부터 추방당하고 인간성이 파괴되가는 하층의 민중을 해방시키고 종교적 사회적으로는 체제전복적인 선언입니다.

질병이 예수의 기적으로 치료됐다 야!!! 신기하다 정말 神이 맞나보다라는 1차원적 인식으로 예수를 믿고 성서를 읽는다면 차라리 새벽에 일어나서 물떠놓고 천지신명께 하루 잘지내게 해달라고 치성이나 드리기 바랍니다.

(자꾸 옆길로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어지네요 죄송)

 

혈우병 여인의 행동은 당시 허용되지 않는 것이지만 믿음으로 사회적 금기를 깨고, 예수를 만졋다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이야기를 해나갑니다.

30-34절은 상상력이 가미된 허구로서 예수세미나에서는 모두 검은색 판정을 받앗습니다.

예수의 힘이 빠져나갔다는 것은 마술적인 이야기로 예수는 힘과 능력이 빠져나 가는 것을 알아차렷고 예수는 누가 자신을 만졌는지 알고자 하엿지만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예수가 이때에는 그 독심술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즉, 실제 사건이라기 보다는 문학적 장치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이러한 문학적 장치로 자신의 해석을 첨가한 것입니다.

 

 

◎ 행적 정리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죽음으로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예수 삶의 목적이자 하느님의 목적이라고 생각해왓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죽음, 즉 그리스도 케리그마에서 절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수난설화는 어디까지 사실이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세미나는 예수의 행적 중 하나로 예수의 수난 설화를 연구하면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 기록된 수난설화 대부분이 진정성이 없다고 간주합니다.

 

다만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과 죽었다는 것은 진정한 사실로 보며 또한 예수가 체포되고 대제사장과 법정에 선것, 그리고 빌라도 앞에 선일은 어느 정도 사실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4복음서에 나온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기록은 복음서 저자의 창작적인 요소가 많고, 전설적인 요소를 첨가시켰기 때문에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예수세미나에서는 결론 짓고 잇습니다.

복음서 이외에 도마복음 등에는 수난설화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잇습니다.

 

도마복음 55장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고, 형제들과 자매들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과 나처럼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무가치한 사람이다’라는 표현을 예수 수난의 표현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잇지만 과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수난사를 신학자들은 시편2편을 예수의 제자들이 확대 생산해낸 창작물로 보고 잇습니다.

 

어찌하여 뭇 나라가 술렁거리며, 어찌하여 뭇 민족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어찌하여 세상의 임금들이 전선을 펼치고, 어찌하여 통치자들이 음모를 함께 꾸며 주님을 거역하고, 주님과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이를 거역하면서 이르기를

"이 족쇄를 벗어 던지자. 이 사슬을 끊어 버리자" 하는가?

 

 

예수세미나의 작업을 통해 예수의 수난중 역사적 행위라고 인정받는 것은 단 2가지 입니다

 

- 예수는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있을 동안 그 권력으로 처형당했다.

- 제자들은 예수가 체포되었을 때 도망갔다.

 

* 유대인 로마장군 요세프스의 기록에도 제자들이 도망가고 예수를 변호하지 않앗다고 기록하고 잇습니다

(요세프스의 기록인지 다른 기록엿는지 기억 약간 가물가물하네요 다시 책 뒤져보고 틀릴 경우 수정해드리겟습니다 ^^)

 

예수의 죽음에 대해 로마는 결백하나 유대인들은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로마권력에 빌붙기 위한 기독교인들의 비겁한 변명이고 선전이라고 보고잇습ㅁ니다.

(제 표현이 과격햇나요?)

 

마커스 보그(신학자 오리건 주립대 교수 옥스퍼드 대학교로부터 종교와 문화분야의 세계 100대 저명한 교수로 선정/전번시간 설명 드렷죠. 작년에 돌아가셧습니다)교수는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대속적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앗고 자신이 하는 일을 계속한다면 세례요한처럼 처형당할 것을 알고 있엇으며 예루살렘 여행이 결국에는 죽음으로 끝나게 될 것을 짐작하고 잇엇다고 주장합니다.

 

존 도미니크 크로산(누군지 전번시간 설명 드렷죠)은 복음서들에 나오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은 역사화된 예언(prophecy historicized)이지, 기억된 역사(history remembered)는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의 수난에 대해 크로산은

 

첫째, 예수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며 그 때 있었던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었던 사실로서 역사적인 수난(historical passion) 즉,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둘째, 예언적 수난(prophetic passion)은 지식이 있는 서기관 출신의 제자들이 예수 처형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의 근거와 정당성을 구약성서 속에서 찾아낸 것이다.

셋째. 설화적 수난(narrative passion)은 예언적 성취들을 연속적인 하나의 설화 속에 배치하는것인데, 여기서 그 설화는 그럴듯한 역사적인 뼈대 속에 녹아든다고 이야기하고 잇습니다.

 

예수가 왜 처형되었는가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보여지는 마가복음에 따르면 대제사장 가야바와 예수 사이의 논쟁에서 예수가 하느님을 모독했기 때문에 사형에 처한다고 기록하고 잇습니다.

그러나 예수세미나에서는 이것은 초대교회의 창작이라고 설명하고 잇습니다.

 

보그는 예수처형에 대해 예수가 사회적 예언자로서 당시의 지배체제에 대해 하느님의 이름으로 도전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수가 단순히 신비가, 치료사, 랍비라면 처형되지 않았겠지만 당시 유대 당국자들은 예수가 행한 체제 비판으로 일어날 대중적인 반란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처형되엇다고 설명합니다

 

 

◎ 예수세미나가 보는 그리스도 케리그마

 

예수세미나는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면서 기독교의 온전한 모습을 찾아가려고 공동으로 노력하고 잇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세미나는 그리스도 케리그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 예수연구는 역사적예수와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연속성을 인정하느냐 아니면 단절되엇다고 보느냐하는 문제를 가지고 잇습니다.

예수세미나에서 그리스도 케리그마를 어떻게 바라볼까요?

예수세미나의 학자들 내에도 그리스도 케리그마에 관해서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잇습니다,

마커스 보그와 크로산은 역사적 예수를 그리스도 케리그마와 관련하여 이해하지만, 펑크는 그리스도 케리그마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잇습니다.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는 역사적 예수를 하느님의 계시로 이해할 수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신의 현현’으로서의 예수는 하느님의 ‘나타남’ 혹은 ‘계시’였고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방식을 통해서도 하느님을 드러냇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형상이었고 신적 실재를 드러내고 매개하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보그는 ‘예수가 자기 자신을 세상의 죄를 대신해서 죽을 목적이나 역사적 사명을 지니고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로 생각하거나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그의 메시지 또한 그를 믿으라는 얘기가 아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역사적 예수는 자신을 하느님의 계시로 주장한 적이 없지만, 기독교인이 예수를 그의 가르침과 존재방식에 기초하여 하느님의 계시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크로산(Crossan)도 근본적으로는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 케리그마는 상호연관해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잇습니다.

‘나는 역사적 예수를 결코 신앙의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키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예수)과 해석(그리스도) 의 결합이다. 그 둘은 분리되거나 혼동되어서도 안 되고, 또한 각각은 매 세대마다 새롭게 발견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둘의 변증법적 구조는 기독교의 핵심이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잇습니다.

크로산은 ‘예수는 누구인가’에서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신앙은 역사적 예수의 모습 속에서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를 발견하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의 현재 삶에 주는 함축적 의미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을 의미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신앙은 역사적 사실들을 넘어서서, 그것의 의미들을 추구하지만, 신앙은 역사적 사실들을 무시할 수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크로산은 ‘사실과 해석이 상호보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관계가 반드시 서로 관련되어야만 한다’며 그리스도 케리그마가 역사적 예수의 사실에 기초를 두고 그 궁극적인 의미를 해석해 주는한 그리스도 케리그마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크로산 주장의 요점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케리그마가 역사적 예수의 사실에 기초를 두지 않고 그궁극적인 의미도 해석해주지 못한다면 그러한 케리그마는 버려질수 잇다는 이야기입니다.

 

펑크(Funk)는 그리스도 케리그마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잇습니다.

펑크는 ‘예수는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내용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며 역사적 예수와 아무런 관련없는 그리스도 케리그마를 예수와 접목시킨 것은 예수를 종교시장에 팔기 위한 마케팅 전략이라고 까지 폄하하고 잇습니다 (일정부분 이해가 되지 않나요)

예수의 추종자들은, 메시아를 마케팅하기 위해 기적을 일으킨 다른 카리스마적 인물들의 행적을 예수에게 입히고 확대 생산해나가는 작업을 통해 메시아 마케팅을 햇다고 주장합니다.

예수 제자들은 예수를 구약과 당시 그리스 로마의 여러 가지 신화적인 설화의 틀 속에 넣어 갈릴리의 랍비 예수를 그리스도로 대치시켯다는 것입니다.

신격화 최종 마케팅은 니케아-칼케돈의 기독론이라고 주장합니다.

(니케아공의회부터 칼케톤공의회까지 결정된 중요한 결정이 바로 삼위일체와 네오토리우스의 파문입니다. 제가 계속 문제점을 주장하는 것이 삼위일체론인 것은 아시죠?예수를 신으로 만들기 위해 억지로 자신들 스스로도 이해못하는 논리로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삼위일체론이고 기독교의 다양성을 말살 시킨 것이 바로 네오토리우스의 파문입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정해진 교리에 위배되는 모든 문서와 서책들이 파괴되고 공의회 결정에 부합하는 4복음서 그리고 바울서신을 중심으로한 지금의 신약만 남겨지게 됩니다.이러한 독단적 행위가 기독교의 독선과 정신병에 가까운 종교적 세뇌작업의 시작인 것입니다. 제국의 통일을 원하던 이교도인 콘스탄티누스 황제(기독교인 아님. 죽기직전까지 세례도 거부햇고 태양신(미트라)의 대제사장직을 계속 유지햇으며 죽기직전 세례도 자신이 원햇던 것인지 불분명합니다)의 의도대로 기독교역시 하나로 통일시켜버린것입니다)

 

펑크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케리그마에 기초를 둔 신앙이란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 자신은 신앙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되며 그것은 예수가 금지한 우상숭배를 되풀이하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예수를 신앙하는 것은 바로 예수의 가르침을 부정한다는 것이죠

펑크는 예수를 격하시켜야 하며 격하된 예수만이 예수의 갈릴리운동의 진정한 뜻을 보여줄수 잇다는 것입니다.

 

 

◎ 예수세미나에서 바라 본 종말론

 

예수세미나의 학자들은 대부분 종말론적 예수의 모습을 부정합니다.

 

첫째, 종말론적 예수의 일차적 기초는 ‘오실 사람의 아들’에 관한 신약의 기록들인데 이 기록들은 오늘날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진정성이 없는 기록으로 즉, 예수의 어록이 아닌 것으로 이해하고 잇다는 점입니다.

둘째,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의 임박한 종말로 이해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마태복음에서는 천국)에 관한 본문 구절들 자체에서도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이것은 제가 수차례 말씀 드렷죠)

셋째, 과거 신학자들은 대부분 하느님의 나라를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적 틀속에서 이해하려 햇지만 이제는 다른 시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수차례 하느님나라(천국)은 하느님의 공의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을 이야기하며 죽어서 가는 천당나부랭이가 아니고 인간이 살고 잇는 이 땅이 하느님의 공의에 의해 제도와 정치가 이뤄지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나라(천국)이라고 말씀 드렸죠?

 

예수 세미나에서는 종말론을 어떻게 볼까요?

 

크로산은 종말론에 대해 ‘묵시적 종말론’(apocalyptic eschatology)과 ‘종말론’(eschatology)을 나누어 구분하고 잇습니다.

묵시적 종말론은 쉽게 말하면 세상이 끝나는 날을 이야기합니다.

크로산은 묵시적 종말론이 예수가 주창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종말론은 ‘세계의 부정’(world negation)을 가리키는 것으로 폭넓은 의미라 가진다고 주장합니다.

종말론(eschatology)은 묵시적 종말론, 유토피아, (민중의)해방적, 무정부주의(anarchism)등 잘못된 세상이 좀더 의롭게 또는 하느님의 공의에 가까운 세상으로 변화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크로산은 ‘모든 묵시적인 것은 종말론적이지만, 모든 종말론이 묵시종말론적이지는 않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보그는 좁은 의미에서 종말론을 이야기합니다.

종말론은 연대기적 미래성과 공적이며 객관적인 방식으로 나타나는 하느님의 극적인 개입 결과 나타나는 철저하게 새로운 상태로서 새로운 땅에서 이루어지거나 다른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백성들의 소망을 포함한다고 보앗습니다.

보그가 언급하는 종말론적 예수는 이 같은 기대가 예수 사역과 메세지의 핵심으로 초대 기독교공동체는 자신들의 생전에 예수가 와서 부활, 심판, 영원한 왕국을 선포할 것이라는 종말적 믿음을 갖고 잇었으며 그들은 다시 올 예수를 기대 하면서 종말적 신앙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즉각적인 종말은 나타나지 않앗고 따라서 보그가 주장하는 예수는 한결같이 ‘비종말론적 예수’가 되버립니다.

즉, 예수는 체제전복적인 랍비라는 것입니다.

 

펑크는 예수의 갈릴리운동이 호소력을 지니는 것은 세상의 불의에 항거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촉기 기독교인들의 묵시 종말론은 현재에서 정의를 구하기보다는 다른 세상, 미래에 바로잡혀질 것을 구하는 보상심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 세상에서 상을 요구하는 감성적인 형태의 이기적인 것이라고 규정하고 잇습니다.

예수의 세속적이고 체제 전복적인 예수운동은 묵시종말론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이야기한 ‘사람의 아들(인자)’이 종말론적 칭호가 아니며 2천년전 시대적 상황과 당시의 언어적 의미를 연구해 보면 예수가 사람의 아들이라고 청주들에게 이야기할 때 청중들은 그 말을 하나의 칭호나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닌 그냥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엿다고 주장합니다.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라고 남성적으로 번역하지 말고 ‘한 사람(the human one)’이라고 번역해야 당시 청중들이 이해하는 바른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크로산은 사람의 아들이 예수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며 심지어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표현으로 마가복음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전승 초기 단계에 종말론적 사상과 결합하여 생겨난 것으로 주장하고 잇습니다.

 

○ 하느님나라

 

보그는 하느님나라가 예수의 갈ㄹ릴리 운동의 핵심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느님나라와 세상의 종말을 연관시키는 것은 복음서 본문에서조차 명확하지 않다고 해석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어록들 자체는 그 안에 임박성의 요소를 전혀 자지고 잇지 않으며 복음서의 어록들은 하느님 나라에 관해 시간적 언어(즉 가깝다든지, 현재 있다든지, 미래적이라든지 하는)를 사용하지 않으며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그 세대와 시간적으로 연결된 세상의 종말 사이에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어록이 해석된다고 이야기합니다.(저도 동의)

구약의 하느님나라는 다윗(또는 다윗의 후손)의 왕권 또는 하느님 주권에 관한 남유다의 전승 이며 신약의 종말로서의 하느님 나라(kingdom as end)는 예수의 메시지의 핵심적 요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예수는 종말로서의 하느님나라 가 임박했다고 말하지도 않앗습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미래(세상의 종말)가 아닌 하느님의 현재적인 왕적 권능을 강조하였으며 유대인들에게 현재의 이땅에 이뤄질 하느님나라를 만들자는 주장을 하고 잇다는 것입니다.

 

 

 

 

 

 

크로산은 예수가 말한 나라는 공의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이지 마지막 심판의 나라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ἤϒϓικεν ἡ βασιλεἰα τού θεού)’(막1,15/눅10,9/마10,7)에서 완료동사가 사용된 것에서 알수 있듯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약속의 의미가 아니라 여기에 현존한다는 의미이며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임박한 미래의 종말론적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현재를 말한 것이며 하느님 나라는 개인적인 꿈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 예수는 직접 기적을 행하고 음식을 나누며 개방적으로 공동식사를 햇다는 것입니다.

하느님나라에 대해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실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행동으로 보여줫다는 것입니다.

치유와 귀신축출의 이(기)적이 기적을 통해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죄이고 저주라고 병을 이해하여 사회로부터 소외시키고 차별하던 당시의 행위를 깨부수는 체제전복적인 행위를 행한 것은 바로 하느님 나라라는 용어가 정치적인 색채를 띠고 잇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갈릴리 운동에서 과격할 정도로 체제전복적인 것과 사회적 차원의 혁명적인 것 그리고 정치적인 것을 빼고 나면 예수는 무의미하며 예수의 죽음 역시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추구한 하느님 나라는 비유로 식사 나눔, 기적의 치유, 귀신 축출을 통한 사회적 변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과격하고 전복적이며 사회 정치적인 의미가 담긴 현존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종북좌파 빨갱이라는 것이죠

 

 

◎ 맺는말

 

예수세미나(Jesus seminar)는 역사적예수를 연구하는 신학자와 관련학자들의 모임입니다.

예수세미나는 역사예수를 연구하지만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는 별개의 역사적 사실적 예수를 연구하는 단체입니다.

예수세미나는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서 예수의 진정한 말씀과 행적을 찾는 일뿐만 아니라 공관복음서가 어떤 의존관계를 갖고 기록되었으며 예수의 언행이 초대교회에서 얼마나 각색되었는가를 동시에 연구하고 잇습니다.

 

예수 세미나의 첫 번째 프로젝트가 예수의 어록 연구이며 예수는 비유와 경구를 통해 일상의 기대와 사회적 관행을 깨트렷으며 겨자씨 비유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구약의 세계수 이미지와 같은 웅장하고 강력한 나라가 아니며 세계수와 같은 전통적 이미지를 조롱하고, 보잘 것 없는 작은 겨자씨가 강한 생명력으로 퍼져나가 다른 세계와 만나 공존하는 포용적이고 생명력 잇는 하느님나라운동을 주장한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의 이야기속에서 가난하고 소외받는 당시 하층의 민중들은 자신의 삶을 보았고 예상치 못한 사고의 전환을 경험햇을 것이며 삶에 대한 희망을 봣을지 모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의 압제 그리고 교조화된 구약의 규례는 일반 유대 민중들의 삶을 망가트려 갈 때 예수의 갈릴리운동은 유대 민인들이 언급조차 하기 어려운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신랄하게 파헤쳐 주엇을 것입니다.

한 단계 나아가 예수는 당신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사회에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를 보여주엇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은 인간답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소외받고 부정한 자들이며 예수는 소외받는 민중을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그리고 복받을 자들로 초대햇습니다.

예수세미나는 이와 같은 예수의 어록 연구에서 예수가 사회 전복적이며, 말씀으로 청중을 휘어잡는 지혜로운 랍비라는 결론을 내고 잇습니다.

예수세미나를 통해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할 때 묵시 사상을 포함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메시아라는 의식도 갖고 잇지 않앗으며 그들은 종말론자인 예수, 사랑과 자비만 베풀었던 예수의 모습에서 벗어나 그 전과는 다른 지혜 교사이자 현자이며 혁명가인 예수를 찾아냇습니다.

 

예수세미나의 예수의 행적 연구에서는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세례 요한의 거창한 주장이 아닌 시장을 걷다가 사람들과 이야기했고, 길에서 만난 이방 여인이나 창녀와 대화를 나누고 부정하고 저주받은 자들로 인식되던 병자들을 만졋고 예수와 교제를 나눈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대 사회에서 부정하고 죄인인 사람들이엇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먼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별을 극복했고 다음으로 그들과 교제하면서 사회적 경계를 허물엇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율법에 의해 다스려지던 유대사회에 고정된 사고를 깨뜨렷습니다.

식사나눔은 대표적인 예수의 행적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리와의 식사’(막 2,15-17) ‘손을 씻지 않고 먹음’(막 7,1-15/눅 11,37-52) ‘향유 부은 여인’(눅 7,36-50)‘삭개오의 집에 머무름’(눅 19,1-10)에 나타나듯이 예수에게 논쟁과 비판 따르던 곳은 대부분 식사나눔의 장소 엿습니다.

당시 식탁의 자리는 사회 계층이 구별되고 거룩성의 정결례가 구현되는 자리엿지만 예수는 부정한 자들과 같이 먹고 마심으로 사람사이의 차별과 정결례를 깨뜨리고 식탁을 개방하엿습니다.

예수라면 비기독교인과 식사하면 식기도를 한다고 다른이들을 불편하게 하지도 않앗을 것입니다.

예수는 그와 함께 했던 부정한 자들의 식사나눔을 비판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일침을 가하며 하느님 나라가 평등하고 인간다움이 넘치는 곳이라는 것을 직접 보여 주었습니다.

 

부정하고 저주받은 죄인이라는 개념을 깨고 예수는 소경, 절름발이, 혈루병 여인 그리고 죽은 사람을 치유햇습니다.

예수가 부정한 자와 신체적 접촉을 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병자를 기적적으로 치유햇다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 자의 사회적인 소외문제와 정신적인 문제까지 어루만져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는 선언을 한 것입니다.

예수의 치유에서 유대 사회의 거룩성과 정결례는 무너지고 예수는 사람을 구속하는 유대사회의 관행이 허위의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입니다.

 

21세기 기독교현실은 기독교의 절대적인 진리가 빛을 잃어가고 현대인들은 역사적 문화적 상대주의속에서 사실에 근거한 과학적 답변을 요구하고 잇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신학자와 종교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아니 한국교회의 현실속에서는 질문 자체를 금기시하며 믿음 없음으로 몰아 부치기 급급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예수세미나는 전문가 집단의 힘을 빌어 공동의 목소리를 만들어 냇고 닫힌 신학을 개방하고 대중과 소통하는 신학의 가능성을 열어주엇습니다.

 

성서안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있는 만큼 우리는 다양한 성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기독교 교리나 행동은 21세기에 맞춰 바뀌어야 합니다.

진리가 어떻게 바뀔수가 있냐는 무식한 목사도 잇겠지만 기독교는 2천년간 3차례 커다란 변화를 해왓습니다.

1차변화는 ad50-60사이 유태교로 부터의 분리입니다

(성서에는 스테반의 순교라는 상징으로 묘사되어 잇습니다)

2차 변화는 콘스탄티누스라는 황제에 의해 국교로 지정되면서 지금 현재의 교리를 가진 로마교회가 주도권을 잡고 그동안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같이 지내던 예수를 인간으로 주장하는 교회, 신으로만 주장하는 교회, 신적인 인간으로 주장하는 교회는 죽임을 당하고 파문을 당하고 쫓겨나게 됩니다.

3차 변화는 여러분도 잘아시는 종교개혁입니다.

 

 

20161006_233335.png

   (다양한 예수의 모습  - 흑인 예수 / 한복입은예수(사마리아여인과) / 보통 예수성화로 인식하는 백인 예수 / bbc에서 복원한 원래 예수의 모습)

 

 

진리는 변하지 않지만 진리인 하느님도 구약에서는 직접 나타나고 신약에서는 예수로 나타나고 예수 사후에는 성령으로 나타난다고 기독교인들의 성서에는 쓰여져 잇죠

정신과 뜻은 지켜야 하지만 형태는 변해왓고 지금도 변해야합니다.

적어도 하나의 목소리만 들었던 기독교인들에게 성서의 합창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세미나의 역사적 예수도 여러 목소리 중 하나에 해당합니다.

예수세미나는 신약학을 대표하지 않고 그렇다고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할 수도 없습니다.

맹점이 없는 것도 아니고 비판받아야 할 부분도 많습니다.

예수세미나를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지만 예수세미나를 비판만 하고 잇는 것 역시 문제입니다.

예수세미나는 예수를 보는 여러 목소리 중 하나에 해당합니다.

예수세미나는 신약학을 대표하지 않고 그렇다고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할 수도 없습니다.

맹점이 없는 것도 아니고 비판받아야 할 부분도 많습니다.

 

예수의 갈릴리 운동의 목적은 당시 경직된 유태교의 거룩함 신성함을 깨부수고 민중과 함께 하자는 운동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를 따른다는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또 다른 거룩함과 신성함에 사로잡혀 비기독교 민중들과 자신들은 다르다는 착각을 하고 예수가 나가리라고 선언한 성전을 다시 짓고 예수가 찟어놓은 성막을 다시 씨우려 하고 잇고 거록한 말로 민중을 옥쪼엿던 유태교 지도자들을 향해 욕을 퍼부은 예수를 잊어버리고 불의를 향한 욕설을 불경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고 2천년전 교조화된 유태교인에 불과합니다.

저주받고 사회와 유태교로부터 버림받은 죄인을 포용한 것이 바로 예수고 예수 정신입니다.

 

예수세미나에서 주장하는 진짜 예수어록과 가짜 예수어록을 나누어 올려드릴까도 햇지만 성서의 예수 어록에 대한 선입관을 가질까봐 고민하다 올리지 않기로 햇습니다.

예수의 어록이 아니라고 판정된 성서구절에서도 하느님을 경험하고 새로운 삶의 결단을 내릴 수도 잇습니다. 왜냐하면 성서 본문이 예수의 진정한 말씀이 아니더라도 초대 교회의 경험과 전통에서 비롯된 신앙의 체험과 고백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의 신앙간증으로 하느님을 경험하기도 하는데 예수의 진짜 어록이 아니더라도 초대교회의 체험과 신앙고백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제가 지난 번에도 몇차례 말씀 드려지만 죤 번얀의 천로역정도 소설이지만 많은 종교적인 감동을 주고 잇습니다.

성서가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충분한 의미가 있지않을까요?

 

 

 

* 개인적인 행사(??)준비로 업로드가 점점 길어집니다 죄송합니다.

바쁘다보니 원고를 몇줄쓰다가 몇일 지나서 또 몇줄쓰다가를 수차례 반복했더니 중간중간 내용이 어색하고 빼먹은 것도 잇고 내용도 좀 부실하고 죄송합니다

10월 15일까지는 양해바랍니다 ^^

 

  • 차영배원주 2016.10.07 21:26
    쌤은 예수의 실체가 인간 사람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강한 의중이 보이네요.
    예수의 게리그마도 성경을 보는 시각에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습니다.
    세계적 성인들의 역사적 기록도(석가, 공자, 소크라데스 등) 제자들이 기록하면서 fact와는 다른 모습도 있겠지만 그 핵심적 가르침은 고전인 것처럼...
    후대 기록자들의 메타언어적 형태가 바르게 전승될 수도 있지만 왜곡될 수도 있습니다.
    세번째 역사 예수 찾기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신의 나라는 네안에 있다"가 많은 부분 공감대를 갖고 있네요.
    예수가 신인지 사람인지 따지는 것을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내가 성경을 읽고 깨달은 나의 "예수 게리그마"가 있으니까요. 이단이라해도 좋고...
    성경의 일부 왜곡될 소지가 있는 부분들 잘라내고 예수의 참 진리인 "게리그마"를 찾아서 재편집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는데(오래전 부터...)
    이 작업은 바른 성경학자들에 의해 이루어 지기를 바라고 있지요. 회망사항에 불과하지만...
    이렇면 나는 완전 이단자로 화형에 처해지겠지요? 걱정하지 않습니다. 죽을날도 얼마 남지않았는데...ㅎㅎ
  • 쥰(joon) 2016.10.07 21:53
    원주아버님 화형이면 저는 벌써 화형됏겟죠 ^^
    예수가 인간사람을 강조햇다기보다는 인간사람인것은 분명한데 신인것은 모르겟길래 ^^
    가능한 제주장은 않하려고 햇는데 속이 보이나봐요
  • 삼막골 2016.11.26 20:04
    종북좌파 빨갱이인 예수는 갈릴리운동처럼
    매일 광화문에서 촛불집회를 하고 계시겠지요..?
    신자의 삶을 다시한번 생각해봅니다^^*
  • 쥰(joon) 2016.12.07 10:40
    횟불들고 그냥 청와대에 뛰어들어가서 개자식들아!! 라고 소리지르셨을 것입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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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종교철학53편(시즌Ⅲ) - 유태교와 예수 1 / 들어가는 글 유태교에서 태어난 기독교   오늘부터는 유태교에서 어떻게 기독교가 탄생했는지 알아보기로 하겟습니다. 여러분들이 제가 신학을 전공한줄 아시는 분도 계시지만... 8 file 2017.01.04
57 종교철학52편(시즌Ⅲ) - 톨스토이 복음서 자동차가 가장 휘발유를 많이 먹을 때가 출발할 때라고 합니다. 두달 넘게 쉬다가 성서인문학을 시작하려니 연말에 신혼이라 시작이 어렵네요 여러분들과 약속한 ... 4 file 2016.12.26
» 종교철학51편(시즌Ⅱ) - 역사 예수 찾기3 전번 시간과 마찮가지로 회색 검은색 어록중 대표적인 것 한두개를 소개해 드리고 마지막 시간에 총정리 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개인적인 사고(?? ^^)때... 4 file 2016.10.06
55 종교철학50편(시즌Ⅱ) - 역사 예수 찾기2 전번 시간에 웨스타연구소에 대해 간략히 알아봣습니다. 오늘은 예수세미나의 진행과정과 결과 그리고 근래 이뤄지고 있는 학자들의 역사예수연구에 대해 간략히 ... 4 file 2016.09.27
54 종교철학49편(시즌Ⅱ) - 역사 예수 찾기1 오늘 주제가 주제니 만큼 제 주장이 좀 강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이해하시고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만 취하시기 바랍니다.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시면 비... 5 file 2016.09.15
53 종교철학48편(시즌Ⅱ) - 사도신경 개인사정으로 어찌어찌하다보니 2주를 쉬었네요 죄송합니다. 사실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정신이 좀 없었네요   전번시간에 고지해 드린대로 오늘은 사도신경... 6 file 2016.09.05
52 종교철학47편(시즌Ⅱ) - 십계명3 ◎ 이웃에 대한 계명   ○ 5계명   כבד ​- 무겁게(해라) את - 을 אביך - (네) 아버지 אמך - (내) 어머니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5계명의 부모에 대한 명령은... 4 file 2016.08.16
51 종교철학46편(시즌Ⅱ) - 십계명2 2편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계명에 대한 해석을 하고 3편에서 이웃과의 계명를 진행하겟습니다. 주기도문과 마찮가지로 원문을 느낌에 가깝도록 해석해드리고 내용... 3 file 2016.08.11
50 종교철학45편(시즌Ⅱ) - 십계명1 중세시대까지는 십계명이 하늘에서 모세에게 휙 던져준 것으로 인식하고 잇어지만 역사연구와 문헌연구가 발전하면서 출애굽과 모세라는 인물인 역사적 사실이 아... 6 file 2016.08.05
49 종교철학44편(시즌Ⅱ) - 주기도문2 주기도문의 본문 분석   1편에서 주기도문의 유대교적 배경을 알아봣습니다. 오늘은 본문에 대한 분석을 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성서의 문서비평과 가설 등에 대... 7 file 2016.07.27
48 종교철학43편(시즌Ⅱ) - 주기도문1 주기도문 (예수의 기도와 유대교 기도)   이번주와 다음주까지 주기도문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아마도 기독교인이라면 주기도문은 모두 외우고 ... 15 file 2016.07.18
47 종교철학42편(시즌Ⅱ) - 모든 신을 모시는 판테온 오랜만에 다시 뵙겠네요 여러분들의 염려 덕분에 잘다녀왔습니다. ^^ 2달이 짧네요   시즌2 시작하기 전에 유럽일정을 간략히 말씀드리면 독일 스위스는 종교관련... 3 file 2016.07.10
46 종교철학 9편 - 해탈하기 / 팔정도 기독교인분들이 대부분인데 팔정도 설명까지는 필요 없을 것 같아 불교편에서 빠졌는데 질문도 들어오고 해서 추가해 드립니다.     불교의 해탈은 수행을 통해서... 5 file 2015.11.05
45 종교철학 8편 - 기독교의 한쪽 날개 / 그리스 역사와 철학(4)     위 그림 한번쯤은 보셨을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이라는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비밀해제에서 몇 달전에 미술사에서 간단히 소개해 드린 적이 있... 3 file 2015.10.24
44 종교철학 7편 - 기독교의 한쪽 날개 / 그리스 역사와 철학(3) 재미있는 전쟁이야기 했으니 공부 좀 해야겠죠 ^^   마지막편은 그리스 철학으로 들어갑니다. 일단 철학편 시작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 역사와 철학 1편'을 꼭 읽... 1 file 2015.10.11
43 종교철학 6편 - 기독교의 한쪽 날개 / 그리스 역사와 철학(2) 고대 유럽(그리스)과 중근동의 본격적인 첫 만남이 바로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입니다. 유명한 영화 ‘300’의 주제이고 유럽의 운명이 결정 지워지는 전쟁입니다.  ... 5 file 2015.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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