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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로부터 비롯되어 몇 달에 걸쳐 한반도 전역을 뒤흔든 일련의 움직임은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일거에 바꾼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사건을 '3·1 운동'으로 부른다.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 가운데 '3·1 운동'만큼 이름에서 신성불가침의 위상을 확보한 경우는 따로 없다. 왜 그럴까?

제헌헌법부터 시작해 현행 헌법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헌법이 전문에서 '3·1 운동'으로 명시해 놓은 데서 답의 일단을 찾을 수 있다. 헌법이 '3·1 운동'으로 규정했으니 거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헌헌법에 '3·1 운동'이라는 표현이 들어가기 전에 헌법기초위원회가 작성한 헌법초안에 '3·1 혁명'으로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실제로 제헌국회의 헌법 논의과정에서 '3·1 혁명'은 갑자기 '3·1 운동'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60년 이상 '3·1 운동'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만이 마치 특허등록된 상표처럼 쓰여 왔다. 그런 가운데 과연 '3·1 운동'이라는 이름이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되어 이후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일대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담고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3·1 혁명' 100주년을 불과 5년 앞둔 이제 지금까지 해왔듯이 '3·1 운동'을 고수할 것인지 아니면 이제부터라도 '3·1 혁명'으로 바꾸어 써야 할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나는 세 가지 측면에서 '3·1 혁명'으로 바꿀 것을 주장하려고 한다. 

'3·1 혁명', 인민은 더 이상 신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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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독립만세 운동 재현 행사'. 지난 2013년 울산시 중구 병영사거리 일대에서 참가자들이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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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3·1 혁명의 역사적 성격과 관련된 것이다. 19세기 말 이후 한국사회의 과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전근대적 요소를 극복해 근대사회를 구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주권을 지키고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는 것이었다. '3·1 혁명'은 이러한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이루려고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3·1 혁명'의 독립 요구에는 두 가지 의미가 복합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독립선언서의 '조선인의 자주민'이라는 말에는 정치적 정당성을 결여한 권력이자 부당한 폭력의 주체인 일제(조선총독부)에 대항해 주권자로서의 민(民)이 봉기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결실이 자유·민주·평등의 가치를 내건 새로운 정치체제 곧 민주공화제의 확립이었다. 

'3·1 혁명'은 현행 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에 법통을 제공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의 첫 헌법문서인 대한민국임시헌장(1919)이 주권의 주체로 명기한 '인민'이 한국역사에서 처음으로 역사의 주체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1910년 국망 당시 황제와 지배층이 지켜내지 못한 국가의 주권을 인민의 힘으로 되찾으려 나선 것은 역사의 주체가 바뀐 것을 보여주는 일대사건이었다.

'3·1 혁명'은 국가의 주인이 더 이상 황제나 소수의 지배층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3·1 혁명'을 통해 제국은 종지부를 찍었고 민국의 시대가 새로 열렸다. 인민은 더 이상 1910년 이전의 신민(臣民)이 아니었다. 목숨을 내건 투쟁을 통해 민주공화국의 주체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3·1 혁명'을 통해 일본제국뿐만 아니라 대한제국도 부정되었다.

'3·1 혁명'을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에 국한시킨다면 그 자체로는 일제의 통치정책에 약간의 변화를 가져온 결과만을 남겼기 때문에 미완의 혁명일 수 있지만 임시정부의 수립에서 상징되듯이 민국으로의 전환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과거와의 혁명적 단절을 초래한 미증유의 사건이었다.

실제로 '3·1 혁명' 과정에서 출범한 여러 임시정부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민주공화제'를 내걸었다. 이후에도 독립운동 진영은 너나 할 것 없이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뒤 만들 국가체제를 민주공화제로 보았다.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서도 다른 나라에서는 흔히 있는 왕정복고파와 민주공화파의 갈등도 없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민주공화제 말고 다른 정체를 이야기한 정치집단이 없었다는 것은 수천 년 동안의 전제왕권과 35년의 일본 천황제를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된 사건은 단순히 독립운동에 그친 것이 아니라 민국으로의 전환을 초래한 민주혁명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임시헌장(1944)에는 '3·1대혁명'으로 적혀 있다

두 번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진영의 '3·1 혁명' 인식과 관련된 것이다.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3·1 혁명'은 '3·1', '3·1 운동', '3·1(대)혁명', '독립선언', '만세운동', '기미운동', '기미독립운동'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어느 특정한 이름만이 '3·1 혁명'을 표상하는 특권을 갖지는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기록을 보면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3·1 운동'이라는 표현을 상대적으로 더 자주 쓰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3·1 혁명'이라는 표현도 쓰이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독립운동의 발전에 따라 독립운동가들은 '3·1 혁명'을 혁명(운동)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중일전쟁(1937) 이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통합을 이루어가던 중국 관내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당시 중국 관내 독립운동의 양대 진영인 임시정부와 민족혁명당이 모두 '3·1 혁명'을 혁명운동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1938년에는 민족혁명당 안에서 '3·1 대혁명'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임시정부도 1941년부터는 '3·1 혁명'을 대혁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실제로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 기관지 <광복>(1941)에 '1919년의 전민(全民) 대혁명'이라는 표현이 등장했고 임시정부가 1941년 3·1절을 맞아 발표한 글에도 '3·1대혁명운동'이라는 이름이 쓰였다. 그 연장선에서 임시정부는 1941년에 만든 건국강령을 통해 '3·1혁명'을 "우리 민족의 혁혁한 혁명의 발인"이자 "우리 민족의 자력으로써 이족전제(異族專制)를 전복하고 오천 년 군주정치의 구각(舊殼)을 파괴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건립하며 사회의 계급을 소멸하는 제일보의 착수"로 규정했다.

이제 임시정부는 '3·1 혁명'에 대해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 민족혁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주와 평등이라는, 근대국민국가에 반드시 필요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한 민주혁명으로까지 파악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제 '3·1 혁명'을 혁명, 더 나아가서는 '대혁명'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굳어졌다. 1941년 말부터는 민족혁명당과 임시정부의 합작이 이루어져 화북으로 가지 않은 민족혁명당원과 조선의용대원이 대거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이로써 '3·1 혁명'이라는 말이 중국 관내 독립운동에서 일상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예를 들어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1943년 다음과 같이 말했다. 

"'3·1'대혁명은 한국 민족이 부흥과 재생을 위해 일으킨 운동이었다.…우리는 '3·1'절을 기념할 때 반드시 '3·1'대혁명의 정신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히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3·1'대혁명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은 바로 '반일독립'과 '민주자유'이다.…자존과 공존, 민주와 단결, 기개와 도의, 자신과 자존이야말로 '3·1'대혁명 정신의 요체이자 전부라 할 수 있다."

김구는 '3·1 혁명'이 독립을 목표로 한 민족혁명이자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민주혁명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는 김구 개인에게 '3·1 혁명' 더 나아가서는 한국혁명의 성격에 대한 인식의 전환의 이루어졌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중국 관내 독립운동 진영의 '3·1 혁명' 인식이 가장 잘 녹아 있는 것은 1944년 임시정부에서 제정한 대한민국임시헌장이다.

대한민국임시헌장(1944)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우리 민족은 우수한 전통을 가지고 스스로 개척한 강토에서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국가생활을 하면서 인류의 문화와 진보에 위대한 공헌을 하여왔다. 우리 국가가 강도일본에게 패망된 뒤에 전 민족은 오매에도 국가의 독립을 갈망하였고 무수한 선열들은 피와 눈물로써 민족자유의 회부에 노력하야 삼일대혁명에 이르러 전민족의 요구와 시대의 추향에 순응하야 정치, 경제, 문화 기타 일절 제도에 자유, 평등 및 진보를 기본정신으로 한새로운 대한민국과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건립되었고 아울러 임시헌장이 제정되었다.(강조- 인용자)"

임시정부의 마지막 헌법문서에 명백히 '3·1 혁명'이 대혁명으로 규정되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김구 등 중국 관내 독립운동을 이끌던 독립운동가들의 합의에 의해 '3·1대혁명'이라는 표현이 대한민국임시헌장에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대혁명이라는 말 자체가 프랑스혁명을 연상시킨다.

당시 대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프랑스 혁명 정도였다. 프랑스혁명을 통해 신생 프랑스가 출현했듯이 '3·1대혁명'을 통해 '자유, 평등. 진보를 기본 정신'하는 주권재민의 민주공화제 국가 대한민국이 출현했다는 긍지가 대한민국임시헌장에는 반영되어 있다. 이제 민족혁명과 민주혁명의 동시 완성은 해방된 이후 새로운 나라를 만들 때의 기본 구상이 되었다.

말 바꾼 이승만... '3·1 혁명'을 '3·1 운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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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28일 열린 ‘제국에서 민국으로’ 학술회의 종합토론. 참석자들은 3.1운동이 아닌 3.1혁명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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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1948년 7월 제헌헌법에 '3·1 혁명'이 '3·1 운동'으로 바뀐 채 들어가게 되는 과정과 관련된 것이다. 1948년 5·10 선거를 통해 구성된 제헌국회는 제헌헌법을 만들기 위해 30명의 의원으로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했다.

유진오안을 중심으로 헌법기초위원회에서 만든 헌법초안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3·1 혁명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전문이 들어 있었다. 

유진오의 회고에 따르면 전문의 '3·1 혁명'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문제제기가 없었다고 한다. 곧 30명의 제헌의원의 합의에 의해 '3·1 혁명'이 헌법초안의 전문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헌법초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이후 문제가 생겼다. 처음에는 의원들도 별 거부감없이 '3·1 혁명'이라는 표현을 썼다 국회의장이던 이승만도 의원 자격으로 한 발언에서 '기미년 3·1 혁명'으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7월 7일 '3·1 혁명'을 '3월 혁명'으로 바꾼 전문 수정안이 다시 본회의에 제출되었는데 이때 조국현이 "조선이 일본하고 항쟁하는 것" 곧 독립운동은 혁명이 될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우면서 '3·1 혁명'을 '항쟁'으로 바꾸자는 발언을 하면서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여기에 불과 엿새 전만 해도 '혁명'으로 부르던 이승만이 "혁명이라는 것이 옳은 문구가 아니라는" 데 가세했다. 

스스로 자랑했듯이 미국통인 이승만이 미국인이 미국의 독립운동을 독립혁명으로 부르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이승만은 '3·1 혁명'이라는 이름이 중국 관내나 만주·노령에서도 일반화되지 않고 있던 '3·1 혁명' 직후 미국에서 '3·1혁명'을 혁명봉기(revolutionary uprising) 또는 혁명으로 지칭한 적이 있었다(Los Angeles Times, 1919년 5월 2일; The Washington Post, 1919년 5월 2일)

1941년 6월 이후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이 되면서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방침에 따라 더 확실하게 '3·1 혁명'을 혁명으로 규정했다. 실제로 1942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워싱턴에서 열린 자유한인대회에 참석한 이승만은 여러 차례 발언을 했는데 그때마다 '3·1 혁명'에 대해 "1919년 혁명", "새로운 혁명", "역사상에서 최초로 있었던 혁명", "무혈의 혁명" 등으로 언급하고는 했다(재미한족연합위원회, <한인자유대회 회의록>). 

따라서 일제 식민통치를 부정하는 것은 혁명이 될 수 없다는 이승만식의 논리는 이전에 자신이 한 말을 뒤집어엎는 궤변에 불과했다. 어쨌거나 이승만이 전문의 '혁명'을 바꿀 것을 주장하자 이승만의 핵심 측근 윤치영이 이승만에 적극 동조해 '광복'이라는 제안을 했고 다시 한민당의 조헌영이 '3·1 운동'을 제안했다.

그리고 이승만계열의 윤치영, 한민당의 백관수, 김준연, 친일파 출신 이종린 등 5명으로 구성된 소위원회에서 조헌영이 제안한 '기미 3·1 운동'으로 바꾼 수정안을 제출했다. 그러자 사회를 맡은 이승만이 토론을 막은 채 수정안을 표결에 붙여 "재석의원 157인 중 가 91, 부 16"으로 통과됨으로써 '3·1 혁명'은 헌법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 제헌국회의 의원 정원이 200명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재적의원 과반수에도 미치지 못하는 91명의 찬성으로 제헌헌법 전문이 통과되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부 의원이 주장했듯이 충분한 토론도 없이 재석의원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헌법 전문같은 중요한 사안을 의결했다는 것은 절차적 정당성에 중요한 흠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3·1 혁명'을 되찾을 때

1919년 3월 1일부터 시작된 만세시위에 참여한 사람은 일제 경찰의 통계에 따르더라도 연인원 200만 명이 넘었다. 일부에서는 '3·1 혁명' 참여자가 1000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당시 1700만 명 안팎으로 추산되던 전체 인구를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일제의 공식 통계만 놓고 보더라도 4만6948명이 체포·투옥되었고, 2만 명 정도가 미결수나 기결수로 수감되었다. 부상자는 1만5900여 명이었고 사망자도 75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수치는 '3·1 혁명' 참여자들의 독립과 자주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그리고 그러한 열망이 어느 정도 거족적으로 넓게 확산되어 있었는지를 웅변으로 보여준다.

세계 혁명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 1919년 3월 1일 이후 우리 민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일어났다. 제헌헌법이 만들어지던 당시의 용례에 따라 혁명을 "한 나라의 국체, 정체, 또는 사회제도나 경제조직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새로 만듦"이라고 본다면 '3·1 혁명'이야말로 제국에서 민국으로의 변화를 초래한 혁명적 사건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좁은 의미에서의 독립운동(민족혁명)으로만 '3·1 혁명'을 이해해 왔다. 이제 민주혁명으로서의 '3·1 혁명'으로 시야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1919년 3월 1일부터 국내외 각지에서 일어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는 민중의 힘으로 주권재민의 근대국민국가 수립과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한 민족·민주혁명이었다.

그런데 한국 역사에서 혁명적 단절을 가져온 이 사건을 우리는 지금까지 거족적 독립운동으로서의 '3·1 운동'으로만 기려왔다. 제헌헌법(1948) 전문에 '기미3·1 운동'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이래 아무런 의문 없이 '3·1 운동'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3·1 혁명'은 임시정부의 건국강령(1941)과 대한민국임시헌장(1944)에 연원을 둔 것이었다.

김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패망과 한국의 독립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3·1 혁명'을 반일독립의 민족혁명이자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민주혁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2019년 '3·1 혁명' 100주년을 맞이해 이제는 '3·1 혁명' 참여자들이 꿈꾸었고 이후의 독립운동가들이 이어받은 '3·1 정신'을 제대로 반영하는 방향으로 '3·1'의 역사상을 복원해야 한다. 제헌국회에서 지워버렸던, 그리하여 이후 70년 가까이 사람들에게 잊혀졌던 '3·1 혁명'의 이름을 되찾는 것이야말로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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